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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프로레슬링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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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5-26 21:41:17 수정 : 2015-05-26 21:4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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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레슬링 경기는 세 줄의 로프가 둘러쳐진 사방 6m의 링 안에서 벌어진다. 레슬러들은 화려한 의상으로 퍼포먼스를 한 뒤 경기에 들어가 무협영화의 한 장면 같은 필살기로 승부를 결정짓는다. 누르기 자세로 상대방 양 어깨를 매트에 닿게 하면 심판의 ‘원, 투, 스리’ 카운트로 경기가 끝난다.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고대 비극 같은 과장의 드라마”라고 했지만, 그것 때문에 어린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 프로레슬링에 빠져들었다.

1960∼1970년대 프로레슬링은 한국과 일본에서 최고의 흥행 카드였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경제개발에 온 힘을 기울이던 사람들을 위무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변변한 운동기구 하나 없던 아이들은 방에 이불을 깔아놓고 레슬러 흉내를 내다가 주먹다짐으로 번지기 일쑤였다.

프로레슬링은 먼저 일본에서 역도산이라는 걸출한 스타에 의해 뿌리 내렸다. 역도산은 원래 스모 선수였지만 한국계라는 이유로 차별 받자 미국에서 프로레슬링을 배우고 돌아와 일본에 프로레슬링 시대를 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실의에 빠져 있던 일본인들은 ‘가라테 촙’이라는 필살기로 덩치 큰 백인 레슬러들을 차례로 쓰러뜨리는 역도산을 보면서 자존심을 되찾았다. 역경을 이겨내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그의 삶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였지만, 안타깝게도 1963년 괴한의 칼에 찔려 39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역도산의 제자 김일은 한국의 영웅이었다. ‘박치기 왕’으로 불린 김일이 역도산 밑에서 동문수학한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언트 바바와 벌인 한·일 레슬링 대결은 모든 국민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다. 국내 최초의 실내 경기장인 장충체육관에서 김일의 레슬링 경기가 열릴 때마다 온 동네 사람들이 TV 있는 집에 모여 열광했다. 김일은 반칙을 당해 피투성이가 돼도 박치기 한 방으로 응징해 극적인 승리를 거뒀고, 조마조마하던 국민은 정의가 불의를 이기는 장면에 환호했다. 그렇게 역사의 상처와 민족의 울분을 치유한 김일이 2006년 세상을 떠났을 때는 프로레슬링이 쇠락한 뒤였지만 많은 이들이 애도를 표했다.

프로레슬링은 이제 아스라한 추억거리로 남아 있다. 영웅들은 사라지고 전설은 빛이 바랬다. 김일의 제자 이왕표가 엊그제 은퇴하는 모습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프로레슬링이 활기를 찾아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시절이 다시 오기를 소망한다.

박완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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