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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모양처’ 이미지 걷어내고… ‘지식인’ 사임당과 만나다

입력 : 2015-05-23 03:02:43 수정 : 2015-06-19 19:4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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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해리/인문서원/1만7000원
사임당/임해리/인문서원/1만7000원

2009년 5만원권 지폐의 인물로 신사임당이 선정되자 작은 반발이 일었다. 구시대 여성상의 상징이자 뛰어난 업적이 없는 신사임당이 5만원권에 어울리냐는 의견이었다. 신사임당(1504∼1551)은 이상적 현모양처로 여겨진다. 그러나 생전 신사임당이 이름을 얻은 건 어진 어머니나 아내로서가 아니었다.

16세기까지 그는 ‘화가 신씨’로 언급됐다. 조선시대에는 현모양처라는 개념도 없었다. 조선은 ‘열녀효부’라는 여성상을 추구했다. 자애로운 미소를 띤 신사임당의 이미지는 그의 사후 정치적 필요에 의해 덧씌워졌다. 지은이는 국가·남성 이데올로기를 걷어내고 지식인 여성으로서 신사임당의 생애를 되살린다.

신사임당이 살던 16세기는 남존여비로 악명 높은 조선 후기와는 달랐다. 당시 결혼한 남성은 처가에서 혼인생활을 시작했다. 부모의 유산은 아들딸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눠졌다. 결혼한 여성은 부모에게 받은 재산을 독자적으로 관리하다 자녀에게 증여했다. 자녀 없이 세상을 뜰 경우 이 재산이 시집이 아닌 친정으로 돌아갔다. 남편이 사망하면 아들이 아닌 부인이 호주를 잇기도 했다. 여성이 재산권을 가졌기에 재혼, 삼혼도 가능했다.

신사임당의 외조부와 아버지 신명화도 강릉 오죽헌에서 처가살이를 했다. 외가에서 자란 신사임당은 열아홉 살에 혼인한 뒤에도 친정 강릉에 머물렀다. 시어머니 홍씨 부인에게 인사를 올린 건 3년 후였다. 혼인 몇 달 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3년상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4남3녀를 키운 신사임당은 평생 ‘뜻을 세우라’고 자녀들에게 가르쳤다. 신사임당 역시 어린 시절 경전을 배우면서 직접 ‘사임당’이라는 호를 지었다. 중국 고대 문왕의 어머니 태임을 스승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저자는 사임당이 군자의 풍모를 지향했다고 해석한다.

사임당은 생전 화가로 이름을 알렸다. 그가 처음 시부모를 뵙던 날 ‘신부가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하니 한번 감상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16세기 문인인 소세양, 정사룡, 정유길은 신사임당의 그림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17세기 노론의 거두 송시열은 정통성 강화를 위해 스승 율곡을 숭상하면서 화가가 아닌 ‘성현의 어머니’로 사임당의 정체성을 강조한다. 이때부터 사임당이 모성의 대명사로 왜곡된다. 일제 시대에는 현모양처라는 여성상이 도입된다. 일본은 조선 여성을 일왕의 자식이 되는 아들을 낳는 존재로 보고 국가주의적 현모양처 이념을 강요했다. 이후 1970년대 박정희정권은 민족과 국가를 앞세우며 사임당을 현모양처의 이상형으로 만들었다. 육영수 여사를 국모로 추앙하면서 사임당과 동일시하는 작업을 전개했다.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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