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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위선과 우리의 진실을 온 세상에”

입력 : 2015-05-21 20:38:46 수정 : 2015-05-21 20:3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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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영웅’
100년 세월을 뛰어넘은 영웅의 외침
“모두 똑똑히 보시오!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살해한 미우라는 무죄, 이토 (히로부미)를 쏴죽인 나는 사형. 대체 일본 법은 왜 이리도 엉망이란 말입니까. 한 나라의 국민으로 태어나 조국을 위해 죽는 것, 이것이 참된 영광이라 나 기꺼이 받아들이니, 그들의 위선과 우리의 진실을 세계에 알려주시오.”

뮤지컬 ‘영웅’ 2막 8장. 안중근(정성화 분)이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같이 절규한다. 이때 “누구의 죄인가. 누구의 죄인가, 누구의 죄인가…” 하는 노랫말이 숨죽이던 관객의 가슴을 파고든다. 객석 곳곳에서는 한숨소리가 새어나온다. 이 순간 ‘영웅’ 관객들은 그간 사느라 바빠 잊고 있던 ‘우리 역사 속 인물’ 안중근 의사를 면전에서 만나게 된다. 

안중근(정성화)이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장면.
최근 서울 용산구 한남동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본 ‘영웅’ 공연장 풍경이다.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이름만 떠올려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단어가 있다. ‘독도’, ‘위안부’, ‘이순신’, ‘유관순’, ‘광복’ 등이 그것이다. ‘안중근’도 마찬가지다. 이들을 주제로 한 공연은 작품성과 관계없이 본전은 하게 마련이다. 조국애를 스스로 확인받거나 확인하고 싶어하는 관객과 단체들이 많이 찾게 마련이다. 그런데 일부 작품은 기대 이하일 경우도 적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안중근을 그린 ‘영웅’은 기대감을 저버리지 않았다. 애국심에 호소하는 감성적인 수준을 넘어 탄탄한 작품성을 보여줬다. 그간 수년간 공연됐던 ‘영웅’에 큰 관심을 갖지 않은 이들이 처음 공연을 보고 난 뒤 나타내는 반응은 ‘기대 이상으로 감동적’이라는 게 공연 주최 측의 설명이다. 특히 올해는 광복 70주년, 하얼빈 의거 105주년을 맞은 터라 기업과 학교 단위 단체 관람객으로 매진이 잇따르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뮤지컬 ‘영웅’에서 안중근(정상화)이 네번째 손가락을 잘라 ‘대한독립’이라 쓴 태극기를 펼치며 독립투쟁의 의지를 다지고 있다.
에이콤인터내셔날 제공
‘영웅’은 안중근이 1909년 2월 단지동맹을 맺고 이토 암살 계획을 실행하는 과정과 1910년 3월 사형으로 형장의 이슬이 되기까지 과정을 극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영웅’의 관전 포인트는 감동적이면서도 웅장하고 애절함이 담긴 넘버들에 있다. 2막의 재판장의 ‘누가 죄인인가’ 외에도 1막 마지막을 장식하는 노래이자 조선독립을 꿈꾸는 이들의 웅장한 하모니가 절정을 이루는 ‘그날을 기약하며’와 처형대에 오르는 안중근의 눈물과 웃음이 모두 담긴 ‘장부가’ 등 웅장한 넘버가 심장을 두드린다. 일본군에 시해당한 명성황후를 그리는 설희의 애절한 ‘당신을 기억합니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일본으로 떠나기로 결심하는 설희의 ‘가야만 하는 길’, 아들을 떠나 보내는 조마리아 여사의 심정을 담은 ‘사랑하는 내 아들, 도마’ 등은 관객의 비감(悲感)을 자극한다. 이외에도 ‘배고픈 청춘이여’ ‘이것이 첫사랑일까’ ‘아리랑’ 등 재기 발랄한 음악도 함께 어우러져 균형을 맞춘다.

하이라이트는 단연 사형집행 직전인 2막9장이라 할 수 있다. 어머니 조마리아가 지어준 수의를 입고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는가”라는 사형 집행인의 음성이 무대에 울려 퍼지자 안중근은 사형대에서 처절하게 ‘장부가’를 부른다.

“하지만 난 왜 머뭇거리나. 하느님 앞에서 무엇이 두렵나. 장부이기를 맹세했는데 왜 이리 두려울까. 뛰는 내 심장 소리, 들리지 않을까, 두려운 나의 숨소리, 저들이 듣지는 않을까….”

죽음을 앞둔 영웅도 인간이기에 느낄 수밖에 없는 고뇌를 엿볼 수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에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물리옵소서”라는 구절과 같은 의미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예수는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며 십자가의 길을 갔고, 안중근 역시 두려움을 떨치고 형장의 이슬이 되며 장부의 길을 갔다는 점이 닮았다는 것이다. 작품에서 안중근을 맡은 정성화의 비중은 가히 절대적이다. ‘영웅’ 초연으로 제16회 한국 뮤지컬 대상과 제4회 더 뮤지컬어워즈에서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배우답게 오케스트라 라이브 연주와 하나 된 그의 대사와 넘버는 관중의 소름을 돋게 한다.

‘영웅’은 단지 관객의 애국심에만 기댄 게 아닌, 작품 내용으로도 보편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다. 안중근이 이토를 살해한 점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그가 동양국가들의 평화로운 공존을 담은 동양평화사상을 강조한 점이나 이토가 권력의 정점에서 허무와 고독을 호소하고, 젊은 여인(설희)이 다가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토로하는 점들은 인상적이다. 광복 70주년의 해에 105년을 뛰어넘어 찾아온 ‘영웅’에게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 31일까지. 6만∼12만원. 1544-1555

박태해 선임기자 pth122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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