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1970년대까지만 해도 흔했다. 농업 생산력이 떨어지는 과거에는 오죽했으랴.
“보릿고개 험해 태행 넘기 같아라 麥嶺崎嶇似太行/ 천중 지나면 그 고개 나타나니 天中過後始登場/ 누가 한 사발 풋보리죽 끓여 誰將一椀熬靑?/ 주사 대감 맛보라 나눠주리오 分與籌司大監嘗….”
다산이 지은 ‘장기농가’의 한 귀절이다. 천중(天中)은 단오요, 태행(太行)은 허베이∼산시성을 가르는 험준한 산맥이다. 주사(籌司)는 임진왜란 후 2품 이상 정승이 모여 국방을 논하던 비변사의 별칭이다. 바닥난 쌀독, 보릿고개 때 참혹한 실상이 드러난다. 흉년이라도 닥치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이듬해 보릿고개 때 굶주린 수많은 사람은 유랑 길을 떠났다. 다산은 안타까워했다. 그의 실학(實學)은 이로부터 비롯된다.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王者以民爲天 民以食爲天).” 춘추시대 제나라 재상 관중(管仲)이 한 말이다. 제가 그 생각을 바탕으로 부국강병을 이루었으니 이후 이 말은 동양 역사를 관통하는 정치철학으로 자리 잡았다.
조선의 임금들은 어땠을까. 그 철학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흉년을 걱정하며 권농(勸農)에 힘썼다. 순조 33년(1833) 설날, 임금은 권농의 하교를 내렸다. “춘궁이 닥치면 백성이 모두 쓰러질 것이니, 내 이를 두려워해 침식을 편안히 한 적이 없다. … 정사(진대와 환곡)를 극진히 하지 않은 바 없건만 수만명의 백성에게는 한 잔의 물과 수레에 실은 땔나무와 같으니, 이를 어찌 하겠는가.” 말만 해 백성의 굶주림을 풀 수 있는가. 이때는 이미 안동 김씨 세도정치에 싹튼 부패가 조선을 뒤덮었다. 만연한 부패에 먹을 것이 없어지니 민란이 일기 시작했다. 홍경래난도 이때쯤 일어났다. 이듬해 순조는 숨졌다. 백성을 걱정한 다산도 두 해 뒤 숨을 거둔다.
북한이 남한에 친지를 둔 사람에게 쌀, 계란, 기름, 고기를 나눠주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산가족상봉에 앞서 영양 상태를 좋게 하기 위한 것이란다. 이런 물음을 던져본다. 북한에서는 인민이 먹을 것을 하늘로 삼지 않는지….
강호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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