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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완식이 만난 사람] 절실함이 배인 한 점 붓질… 화선지 위에 희열이 꽃 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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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4-20 20:49:05 수정 : 2015-04-20 20:4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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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붓 잡은 지 6년… 5월 개인전 여는 황여신 작가
여성작가들은 대부분 결혼과 함께 작가의 길을 잠시 내려 놓는 경우가 많다. 가사와 작업을 병행한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다. 그러기에 아이들을 다 키워놓고 다시 붓을 잡지만 세월 앞에 무뎌진 손에 좌절하기도 한다. 한때 유망작가로 기대됐던 황여신(본명 황혜경·53)작가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난 6년간 칩거하며 붓과 씨름을 해야 했다. 이제사 모진 추위를 이겨낸 꽃망울들이 화사하게 피어나며 그동안 잘 견뎌왔다고 말을 건네는 듯하다. 10년 전 전시장에서 그림에 대한 열망을 토해냈던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황여신 작가가 모처럼 작업실에서 나와 활짝 핀 진달래 꽃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봄꽂들이 그동안 잘살아 왔구나. 푸근하게 토닥거려 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운명처럼 무언가에 이끌리듯 다시 붓을 잡은 지 6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제 삶에 주는 선물인듯, 그토록 찾아 헤메던 보물이 제겐 그림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다시 붓을 잡아 선을 그으면서 희열을 느꼈다. 삐뚤빼뚤하던 선들이 자유로이 춤을 추고, 화선지 위를 타고 흐르는 먹물은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마음과 정신과 몸이 극도의 피로에 이르러, 더 이상은 할 수 없다고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다가도, 더 할 수 있다고, 이 순간을 넘어가면 그 무엇인가 기다리고 있다라고 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외치는 소리를 붙잡고 한 점 또 한 점 그려가며 저의 한계점을 높여왔습니다. 그것이 깨달음과 인고의 시간들이었고 행복한 날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요즘 드물게 다섯 아이를 낳아 키워온 엄마다. 아내와 엄마로서의 소홀한 점을 메워주며 항상 옆에서 조언과 격려로 울타리가 되어준 남편과, 오히려 엄마를 자랑스러워하며 자신들의 삶을 열심히 가꿔가고 있는 아이들이 고맙다.

“남편은 제게 늘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은 자기 자신에게 기회를 주는 삶’이라며 힘이 돼 주었습니다. 그림은 제 삶에 가장 큰 선물이지요.”

사실 예술가의 삶을 옆에서 지켜본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가족에게 미안하지만 결코 자기를 찾는 작업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가로 사는 것은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고 그것이 한없이 반복되기에 공허하게 보이기 십상이다.

“목마른 기다림으로 죽을 것 같은 절실함이 있어야 한다는 선배작가들의 말들이 비로서 가슴에 와 닿아요. 그 절실함을 끌어내는 것이 바로 예술가의 삶이죠.”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는 많은 것을 내려 놓아야 했다.

“산행을 할 때 가장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배낭의 무게감이지요. 내 힘으로 지고 가야 할 무게가 짐이라면, 더 많이 담을 게 아니라 더 많이 줄이는 게 옳은 일이지요. 인생이라는 산을 종주하는 데 필요한 것은 많은 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베테랑 산악인처럼 꼭 필요한 것만 챙기고 나머지 짐을 버리고 가는 것입니다.”

늘 너무 많은 걸 짐 꾸러미에 쑤셔넣으려 애쓰는 우리네 삶을 되돌아 보게 만든다. 자기 등으로 감내하지 못할 무게의 짐은 어쩌면 불필요한 욕망의 대상일 수도 있음을 그는 붓질로 새기고 있다. 소박하고 담백한 기운이 담긴 그의 수묵담채화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그림에 대한 타고난 재능이 있다는 주위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는 홀연히 화단을 떠났었다. 대신 엄마와 아내라는 위치에서 사람에 대한 애뜻한 감성을 키웠다.

“예술이라는 것은 기능의 숙련만으로 되는 것이 아닌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지난 시간들은 삶에 대한 안목뿐 아니라 그림에 대한 안목을 높이는 기회가 됐습니다. 그런 덕인지는 몰라도 요즘 종종 저에게서 인간냄새가 난다는 소리를 하는 이들이 많아졌어요. 어찌 됐건 행복한 일이에요.”

근래 그는 하루 그림 두 점을 그려낼 정도로 24시간 작업실에 머물렸다. 주위에서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냐는 소리도 들려왔다. 황소 고집에다 열정으로 똘똘 뭉친 모습이다.

“아무리 재능이 있더라도 작업량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기량이 향상되지 않아요.”

고매의 기품을 수묵담채로 풀어낸 ‘日久之情 -오랜 정처럼 아름답구나’
수묵의 농담이나 중첩 여부와 상관없이 맑고 담백한 먹의 맛은 수많은 붓질을 통해서 이르게 된 경지다. 수묵에서 탁한 기운을 걷어내면 생동감은 저절로 얻어지게 된다. 의식적으로 생동감을 표현하려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군더더기를 덜어낸 단출하면서도 깔끔한 구성은 그렇게 성취되는 것이다.

“먹의 기운을 살려내면 생동감이 자연스럽게 살아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맛에 취해 그림을 그리지요.”

그는 요즘도 수없는 선 긋기로 손을 다진다. 구도에 따른 형태의 조형적 실험이 바로 이어진다. 건강한 몸을 위한 운동처럼 건강한 그림을 위한 몸 단련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문인화부터 산수화까지, 더 나아가 추상화까지 섭렵하고 있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여성이 화가로 산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힘든 일이에요. 19세기 인상파 최초의 여성 화가 베르트 모리조도 그랬지요. 늘상 한계와 대면해야 했던 것은 지금의 한국 여성작가들과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늘상 예술과 가정 사이에 감정적 갈등과 긴장을 안고 살아야 한다. 자칫 이런 분위기가 창의력 제약으로 이어질 수 있다.

“베르트 모리조가 많은 사회적 제약으로 고통스러워했던 모습에 공감이 가요. 당시 그가 바랐던 것은 혼자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 마음대로 공원의 벤치에 앉을 수 있는 자유, 교회나 미술관에 들어가고, 밤에 오래된 거리를 거닐 수 있는 자유였지요. 그것이 그가 바라는 것이며, 그런 자유가 없는 사람은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 없다고 고백을 했어요.”

그는 시대가 많이 바뀌었어도 여전히 많은 제약들이 다른 얼굴로 여성 작가들 앞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부정적으로만 생각지는 않는다.

“어차피 작가들은 자신만의 작업에 몰두하기 위해 세상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지요. 그렇다고 세상 문제와 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를 창작 에너지의 불쏘시개로 삼을 뿐이지요. 또 다른 세상을 만나기 위한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술이라는 종교에 귀의한 수행자처럼 자신의 삶을 혹독하게 내몰고 있다. 때론 현실을 등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들이 세상을 등진다는 것은 세상을 등에 짊어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저의 고통스러운 자리가 누군가에겐 지복의 자리가 됐으면 합니다. 그래서 저 같은 예술가가 어디엔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삶에 위안이 될 겁니다.” 그가 내달 13일부터 19일까지 인사동 갤러리M에서 개인전을 연다. 한 여성작가의 쉽지 않았던 지난 노정을 엿볼 수 있는 자리다. (02)737-0073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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