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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칼럼] 110원에서 110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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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4-16 20:58:17 수정 : 2015-04-16 21: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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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쓴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대한민국 정치사회
검찰이 원칙적 수사로 뼈아픈 교훈 남겨야
110원. 경남기업 주식이 상장 폐지(상폐) 직전인 14일 시간외 단일가 거래에서 기록한 종가였다. 앞서 오후 3시에 마감된 정규 거래에선 113원의 종가가 기록됐다. 국내 건설사 ‘상장 1호’였던 경남기업은 이 종가와 함께 코스피 상장 42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보기 민망한 상폐 드라마였다.

미국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에 따르면 인간은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내일 주가가 어찌 움직일지 모르는 사람이다. 다른 하나는 내일 주가를 알 수 없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이다. 경남기업의 ‘잔인한 4월’을 먼 과거에 내다본 사람은 있을 수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더라도 1994년 주가가 22만원을 웃돌았고, 지난해만 해도 시가 총액이 제법 되던 상장 1호 주식이 휴지 조각 신세가 된 것은 허망한 일이다. 기업 회생 가능성을 믿고 매도 주문을 망설인 투자자들은 피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비극이다.

3000만원.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자살에 앞서 경향신문과 가진 전화 인터뷰에서 2013년 4월 이완구 총리에게 줬다고 주장한 금액이다. 고인은 ‘사정 대상 1호’로 이 총리를 지목하기도 했다. 이 총리는 “돈을 받았다는 어떤 증거라도 나온다면 내 목숨을 내놓겠다”면서 결사적으로 맞서고 있지만, 이런 낯 뜨거운 논란으로 국가사회가 요동치는 것 자체가 여간 불미스럽지 않다.

이 총리뿐인가. ‘성완종 리스트’, 녹취록 등에는 당대 실세들이 줄줄이 거명된다. 로비 금품으로 볼 수밖에 없는 숫자도 나열된다. 그 신뢰성이나 법적 증거능력에 관계없이 정치권은 혼비백산이다. 나라 한복판에서 초대형 폭탄이 터진 것이다. 국가 전체로 보면 경남기업의 상폐 드라마는 이쪽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자칫 집권 3년차 국정동력이 유실될 판국이다. 국가의 명줄을 잡고 흔드는 막장 드라마가 펼쳐지는 셈이다.

경험과 실수, 실패로부터 뭔가 배우는 법이라면 대한민국 사회는 엄청난 비용을 치르면서 배울 만큼 배웠다. 1990년대 한보그룹 사태를 돌이켜 보자. 당시 정태수 회장이 뿌렸다고 자백한 불법 자금 추문으로 그 얼마나 시끄러웠던가. ‘차떼기당’ 논란이 불거졌던 2002년 대선 불법자금 사건의 기억도 선명하다. 정치권은 그럴 때마다 정화를 외쳤고, 개혁을 합창했다. 돈은 묶고 입은 푸는 방향으로 2004년 ‘오세훈법’도 만들었다. 그런데도 바뀐 게 없다. 경험에서 배우지 못한 것이다. 2008년 ‘박연차 게이트’가 터졌다. 이번엔 ‘성완종 리스트’다. 권력의 그늘에서 돈과 특혜를 맞바꾸는 관행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것인가. 기가 찰 노릇이다.

이승현 논설위원
습관은 무섭다. 정치 관행도 그렇다. 성 전 회장이 던져 놓은 폭로성 주장의 전부가, 혹은 일부가 사실이라면 정치권은 단죄의 도마에 오를 수밖에 없다. 정화 기능은 없고 못된 관행만 있는 집단적 파렴치의 죄가 크다. 검찰이 명운을 걸고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 어떻게? 어렵고 복잡할 게 없다. 이 총리가 명확히 길을 제시했으니 그의 향후 거취와 관계없이 그대로 이행하면 된다. 이 총리는 지난달 12일 대국민담화에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부정부패를 발본색원하겠다”고 했다. 검찰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원칙으로 임하면 될 일이다. 그렇게 뼈아픈 교훈을 남겨야 한다.

110원. 초등학교를 중퇴한 성 전 회장이 10대 초반에 상경했을 때 수중에 쥐고 있었던 돈이다. 14일 시간외 종가와 공교롭게도 똑같다. 고인은 입지전적 인물로 남을 수도 있었다. 정치 연줄이나 ‘의리, 신뢰’를 찾는 대신 피땀 흘려 사업을 일궜더라면 말이다. 안타깝고 답답하다. 110원으로 떠서 110원으로 진 무지개 인생이었던 것일까. 그 공교로운 숫자의 일치 앞에서 고인의 인생을, 경남기업의 부침을, ‘성완종 파문’에 휩쓸린 정치권력의 운명을 숙연히 생각하게 된다.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인가. 성완종 파문에 휩쓸려 정신 못 차리는 이들에게, 또 지금도 어딘가 그늘진 곳에서 저급 정경유착을 획책할 이들에게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경구를 들려주고 싶다. 물론 순진한 소리 말라고 코웃음들을 치겠지만. 트웨인은 말했다. “우리가 죽으면 장의사마저도 아쉽게 생각하도록, 그렇게 살자”고.

이승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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