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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피렌체 소녀들의 죽음 둘러싼 미스터리

입력 : 2015-04-03 10:54:55 수정 : 2015-04-03 10: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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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미시사 '르네상스 뒷골목을 가다'
르네상스 문화가 번영하던 1544년. 그 문화의 중심에 있던 이탈리아 피렌체에 '피에타의 집'이라는 자선 쉼터가 세워졌다. 집 없는 소녀들을 위한 일종의 복지시설이던 이곳에서 당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처음 14년간 수용된 소녀 526명 가운데 반 이상이 죽고 고작 202명만 살아남은 것이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만든 시설에서 이런 참극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궁금증을 자아낸다. 국내에서도 여러 차례 사회복지시설 내 인권유린 사건이 문제가 됐으므로 상상력을 자극할 여지도 충분하다. 다만 '피에타의 집' 사건은 오랜 세월이 지났고 사료가 거의 없다시피 한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역사학자 니콜라스 터프스트라는 이처럼 온전한 진실을 밝혀내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각조각 남은 단서들을 긁어모아 당시 '피에타의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재구성한다. 최근 번역 출간된 '르네상스 뒷골목을 가다'에는 르네상스라는 화려한 시절에 묻힌 죽음의 기억을 끄집어내려는 저자의 이같은 노력이 담겼다.

저자는 소녀들에게 일어난 비극의 열쇳말로 당시 르네상스 사회를 지배한 '젠더의 정치학'을 제시한다. 성적·경제적·종교적으로 철저히 위계화해 있던 가부장 중심 사회에서 하층 소녀들의 열악한 지위가 그들의 죽음으로 이어졌다는 논리다.

소녀들에게 찾아온 첫번째 비극은 혹독한 노동이었다. 민간 복지시설인 '피에타의 집'은 기부금만으로는 운영비를 감당할 수 없어 결국 저임금에 노동집약적인 견직물 제조업 공장으로 변모한다. 견직물 제조는 매우 강도높은 노동이었고, 이미 숙련된 남성 노동력이 점유한 분야에서 소녀들의 처우는 착취에 가까웠다.

어린 나이에 과중한 노동에 시달리다 보니 소녀들의 몸이 성할 리 없었다. 폐결핵을 비롯한 호흡기 질환과 피부병이 만연했을 뿐 아니라 '처녀들의 질병'으로 불리는 위황병(빈혈의 일종)도 발견됐다. 르네상스 시기 위황병을 앓는 소녀에게 가해진 치료법 중 하나는 어이없게도 성관계를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소녀들은 값싼 노동력이었을 뿐 아니라 공공연한 성 착취의 대상이기도 했다. 명문가 예비 사위가 성행위를 할 능력이 있는지 증명하고자 '피에타의 집' 소녀 중 하나를 겁탈하도록 했다는 대목은 소녀들이 당시 사회에서 일개 재산으로 간주됐을 뿐임을 여실히 드러낸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저자는 "무엇이 피에타의 집 소녀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는가에 관한 질문에 결코 쉽게 그 해답을 제시할 수 없다"며 이같은 미시사적 연구의 한계를 분명히 제시한다. 그러나 소녀들의 이야기를 철저히 배제한 '공식 기록'의 행간을 당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읽어내 하나의 서사를 완성하는 역량은 매우 탁월하다.

글항아리. 임병철 옮김. 436쪽. 2만원.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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