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기별’은 지인이 전하는 “갸가 갔다”는 기별로 시작한다. ‘갸’의 네팔 이름은 ‘소누’. 이 소녀는 가물가물 피어오르는 흰 연기 속에서 꼬치를 굽던 인물이다. 화자인 나 ‘박’이 네팔에서 장기 체류하면서 보일 듯 말 듯 연기 속에 아른거리는 이 소녀, ‘소누’에 대해 연정을 키운다. 박에게 그녀의 이름은 ‘안나’였다. 히말라야 아랫마을 포카라 사람들이 여신으로 올려다보고 있는 ‘안나푸르나’에서 따온 이름이다. 여신 같은 안나를 박은 지켜만 보다가 귀국한다. 한창 민감하던 중학생 때 어머니를 여의고, 늘 무뚝뚝한 표정으로 차가운 유리만 만지는 아버지 손에서 자란 그이였다. 그래서인지 늘 찰랑이고 철썩이며 여울지는 물소리가 좋아 포카라 호수에서 노를 저으며 안나를 조각배에 태우고 좋아했다. 그 안나가 죽었다는, ‘갸가 죽었다’는 전갈을 받고 네팔로 날아가, ‘갸’의 내생을 기원하는 단편이다.
오래전에 죽은 이들의 유골을 살피는 고고학자가 등장인물로 나서는 ‘밤의 관조’에서는 무릎관절 뼈 중 하나인 ‘슬개골’로 운명을 바꾸는 장례풍습이 소개된다. 경주박물관 미술관 신축공사 현장에서 발굴된 신라 우물과 그 안의 어린아이 인골과 더불어 삶의 모호한 안개를 보여주려는 작의가 보인다. ‘꽃 핀 언덕’의 ‘L’이란 사내는 “죽음을 입에 올릴 때면 단 과육을 깨물기 직전의 악동처럼” 입가를 일그러뜨린다. 이 단편의 주요인물 ‘U’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시종 독자들을 끌고 가는 궁금한 대목이지만, 작자가 밝히지 않았듯이 생사 여부가 중요한 건 아니다. 살아 있어도 누군가에게는 죽은 사람인 사람도 있다. 함정임은 이 소설집 작가의 말을 시처럼 써 넣었다.
“어느 순간부터// 소설쓰기란/ 추모의 형식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세상 어느 한 곳/ 어느 하나/ 불러보고 싶은 이름들이 있다.// 미처 다가가지 못한/ 미처 풀지 못한/ 미처 주지 못한// 그들에게/ 이 하찮은 소설 조각들을/ 바친다.”
글·사진=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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