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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외방선교회 라미로 신부…“한국·멕시코 문화에는 교만함이 없어”

입력 : 2015-04-01 13:28:07 수정 : 2015-04-01 14:4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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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멕시코는 강대국의 지배를 받았던 공통점 있어”

 

과달루페 외방선교회 한국지부 라미로 신부가 한국 내 활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한국에서 선교를 시작한 지 53년째, 묵묵히 낮은 자리에서 누구보다도 수고한 멕시코인 가톨릭 선교사 신부들이 있다. 과달루페 외방선교회.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그들의 행보가 궁금해 서울 사무실을 찾아 라미로(51) 신부와 마주 앉았다. 자신의 한국명을 ‘남일오’로 소개하며 얼굴 가득 미소를 담은 그에게서 왠지 모를 편안함을 느꼈다. <편집자 주>


-과달루페 외방선교회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달라

20세기 초에 멕시코 주교들은 멕시코 교회가 많은 축복을 받았으며 그 받은 선물을 세계의 다른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메리놀 외방선교회 소속이었던 에스칼란테 주교가 임지인 볼리비아에서 돌아와 1949년 10월에 세계 선교를 위한 ‘과달루페 외방선교회’를 결성했다. 그 선교회는 처음부터 멕시코 국내가 아닌 외국 교회를 위한 공동체로 시작했다. 1959년 일본을 시작으로, 1961년 한국, 1965년 케냐 등지로 선교사를 파견해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선교사들이 해외에 파견되면 주로 어떤 식으로 활동하게 되나

사제는 하는 일에 따라 세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교구 사제와 수도원 사제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교구 사제도 아니고 수도원 사제도 아닌 중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우리는 특정 교구에 국한하지 않고 주교가 보내는 데로 갈 수 있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곳에 어디라도 갈 수 있다. 기본적으로 사도직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지만, 필요한 경우에는 혼자서도 활동할 수 있다. 반면 수도자는 늘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한다. 프랑스의 파리 외방선교회 등과 같은 다른 외방선교회도 다 똑같은 방법으로 활동하게 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교회가 원하는, 주교가 시키는 일을 우리가 하는 거다.

-어떤 식으로 선교사를 파견하게 되나

해당 국가의 주교가 직접 멕시코에 찾아와서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기도 하고, 편지를 써서 요청하는 경우가 있다. 한국도 1962년에 부산교구 주교께서 멕시코를 직접 방문해 선교사 파견을 요청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당시 한국에는 성직자나 수도자가 많지 않았다.

-한국 교회에서 과달루페 외방선교회 신부들의 업적은

우리는 이곳에 한국 교회 협조자로 왔다. 앞에서 지도하는 이로서보다도 처음부터 사목하기 위해 왔다. 우리는 교회 건물이 있는 곳에도 보내졌고 어떤 때는 건물 없이 땅만 있는 곳에도 보내져 교회를 만들도록 됐다. 내 경우에도 순천에 있는 본당 성당에 있었는데 몇 년 전 광주대교구 성당이 너무 크고 사람들이 많아서 신자들이 신앙생활하기 위해 나눴다. 그때 새로 땅을 구입했는데 주교가 우리에게 그 일을 맡겨 줬다. 땅만 있는 곳에 가서 그 지역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배정됐고 기존 성당에서 빌려주는 돈으로 교회를 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건물 지하 장소를 빌려서 미사도 병행했다. 작은 방에서 시작해서 점점 큰 곳으로 옮겼다. 임시로 있을 성당을 구입했고 신자들이 늘어나면서 공간이 부족해지자 신자들도 교부금 내면서 시간을 두고 튼튼하고 아름다운 성당을 지었다.

 -선교회 본부가 순천에 있는 이유는

우리가 부산에 있을 때 광주대교구의 초대를 받았다. 광주대교구에 여러 본당이 생겼고, 그 이후에 부산교구에서도 다시 초대해서 사직동 성당에서도 몇 년 동안 일했다. 제일 오래 있었던 곳은 광주대교구, 특히 순천 지역이고 이밖에도 고흥, 보성, 여수, 여천 등 여러 곳을 우리에게 맡겨 줬다.
 
매곡동 성당이 있었다. 모임 있을 때 모이던 곳이다. 잠도 자야 하니까 근처에 작은 집을 구했다. 그 후 그 집이 본부가 됐다. 나중에 시내에 있던 그곳을 술집이 많이 생기고 시끄러워져서 팔고 현재의 위치, 연향동에 새로 본부를 짓게 됐다. 이후에 선교사들이 한국어 교육을 위해 당시 서울에 어학원이 있었으니까 선교사들이 이곳 서울에 와서 성당에 숙식하면서 한국어를 배웠다. 처음엔 성수동 성당에도 있었고 나중에 현재의 집을 독일 수녀들이 한국 떠나면서 우리에게 줘서 사용하고 있다. 옛날 집이라 많이 망가져서 1994년에 새로 지었다. 이후 이곳 마포구 합정동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

과달루페 선교회 신부들이 중점을 두는 것은 사회 복지보다도 사목 활동이다. 우리가 시골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고 떠나도 본당 사목 활동에 중심을 둔다. 주교가 새로 시작하는 곳에 보내면 우리는 새로운 곳에서 일한다. 몇 년 전에 광주대교구에서 성소(공소) 하나를 우리에게 맡겨 이 공소에 가서 성당 만들라고 해서 운영하고 있다.

지금도 우리 선교회 신부들이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 많은 성직자가 생기고 한국인 신부들이 많이 생긴 후로는 본당 활동은 좀 덜 하게 됐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특수 사목 활동을 하게 됐다. 순천에 있는 바오로 병원에서 원목 활동과 수녀들 미사를 위해 한 명 일하고 있고 다른 신부는 서강대학교에서 예수회 신부들과 함께 학교 활동을 하게 됐다. 광주의 한 시장에서 일하는 신부도 있다. 장사하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위해 거기에 작은 성당을 세웠다. 나도 학교 활동 하고 있다. 서강대와 가톨릭대, 서울대에서 스페인어를 가르치면서 서울대 사목 활동 책임자인 낙성대 성당의 주임 신부를 도와 그분이 원하는 대로 활동하고 있다.

라미르 신부가 과달루페 외방선교회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멕시코인 선교사들의 장점은 무엇인가

문화다. 멕시코와 한국의 공통점은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이다. 역사를 보면 한국 사람들이 많은 고통을 받고 고생 많이 했다. 멕시코도 마찬가지로 스페인의 지배를 400년간 받았다. 역사를 보면 다른 나라를 지배한 튼튼한 나라 사람들은 교만이 있는 것 같다. 물론 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외국에 나가면 다른 나라 사람들을 밑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한국 문화나 멕시코 문화에는 그런 교만이 없다.

우리는 문화적으로 한국 사람들과 쉽게 지낼 수 있다. 사실 내가 신부로서 지도자 입장에 있지만 사람들과 편하게 느끼고 서로 말 안 해도 그렇게 느낀다. 우리가 예전에 있었던 성당에서도 신자들이 쉽게 다가와서 우리와 함께 생활하고 편했다.

-과달루페 성모에 대해 한국 사람들이 잘 모른다

과달루페 성모는 1531년에 멕시코에서 발현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분은 성모 마리아, 예수님의 어머니시다. 과달루페 성모는 발현 이래로 멕시코 역사 안에서 오늘날까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내가 잠시 미국 성당에서 일할 때의 경험인데, 과달루페 성모 축일에 멕시코 사람들이 새벽 4시부터 성당을 꽉 채웠다. 그런데 한국인 신자들도 많이 왔다. 빈자리가 없었다. 멕시코 사람들이 과달루페 성모를 아주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 한국 신자들이 이걸 보고 과달루페 성모가 누군지 궁금해 했고 멕시코 사람들이 설명해 줬다.

과달루페 성모의 메시지는 바로 ‘복음화’, 성모의 모든 메시지는 다 똑같다. 성모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고 우리를 인도하여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달루페 성모 모시는 공동체다. 우리가 과달루페 성모를 만든 것이 아니다. 성모께서 멕시코에서 발현하실 때 그러한 모습을 선택했다. 피부색도 원주민을 따라서 선택했고, 옷차림도 그들의 모습으로, 언어도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선택했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성모를 모시고 가는 거다. 천주교회는 주님을 믿는다.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 했고, 성모는 우리를 예수께 인도한다. 복음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수님과 성모 간의 경쟁은 전혀 없다. 우리가 따라야 하는 분은 예수님이다.

-라미로 신부가 한국에 와서 헌신하겠다고 생각한 동기가 있을 것이다

내가 생애 첫 번째로 만났던 외국인이 한국인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을 것이다. 그때까지 텔레비전에서 미국인들을 봤지만 외국인을 실제로 만나 본 적은 없었다. 예비 신학교 모임이 있었는데 그곳에 과달루페 선교회 소속 신부 따라서 한국인 교사가 왔다. 그래서 미국뿐만 아니라 멀리 외국에 한국 땅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는데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다른 언어도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 사람이 아리랑 노래를 불렀는데 그것은 아직도 내가 기억한다. 우선 내가 아주 좋은 인상을 받았고, 그 사람이 통역을 통해서 한국에 선교사로 많이 오도록 말했는데 나한테도 나중에 선교사가 되면 한국에 와 달라고 했다. 이후 과달루페 선교회를 알게 되면서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도 있고 아프리카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공부 열심히 해서 신학교에 가게 됐다. 다른 나라 교회 얘기도 많이 들었지만 한국에 관해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됐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5년 동안 스위스에서 공부한 후 사제 서품을 받고 3년간 멕시코에서 의무 활동을 했는데, 계속 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1993년에 한국에 발령을 받아 오게 됐다. 중간에 3년간 멕시코에 있던 때를 제외하면 그때부터 20년 동안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 계속 있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한국 사람들이 내 마음을 잡아서였다. 5년쯤 지난 후 휴가를 받아서 멕시코에 가서 부모님을 만났다. 한국에서의 생활을 얘기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내게 한국에 빨리 돌아가라고 했다. 한국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한국으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마음 편하게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까 가라고. 아버지는 내 마음을 아니까 한국에 돌아가라고 했다.

어머니도 몇 년 전에 한국에 와서 내가 살고 있는 것을 보고 갔다. 공항에서 헤어질 때 어머니에게 물어봤다. ‘어머니, 눈물 흘리실 이유가 있으세요? 내가 어디에 있는지 봤고, 다른 사람들이 내게 대하는 것도 봤는데, 섭섭하거나 울어야 할 이유가 있나요?’라고. 어머니는 ‘직접 봤으니까 한국 생활에 대해 걱정 없다, 한국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 같다, 한국에서 계속 있어라’면서 눈물 흘리지 않고 한국을 떠났다. 나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나에게 잘해 줘서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나 자신에게 말하면서 눈물 흘리지 않았다.

정리=손인철 기자 jknewskr@segye.com

<종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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