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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디케의 도장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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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3-27 21:13:46 수정 : 2015-03-27 21: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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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장님 판사’였다. 멀쩡한 두 눈을 갖고도 유독 법정에서만 맹인 행세를 했다. 재판이 시작되면 흰 천으로 두 눈을 가린 채 판사석에 앉는다. 모든 서류는 법원 서기가 대신 읽어준다. 오로지 귀와 입으로만 재판을 진행했다. 판사로 재직한 14년 동안 줄곧 이런 식으로 재판을 열었다. 미국의 세인트루이스 지방재판소 베크 판사에 얽힌 일화다.

베크는 육신의 눈을 감고 양심의 눈을 뜬 판사였다. 주위 사람들이 까닭을 묻자 그가 말했다. “아무리 훌륭한 재판관이라도 소송 당사자의 얼굴을 보면 마음이 흔들리게 됩니다. 저도 인간인지라 그 사람을 보고 어떤 선입견을 갖게 된다면 공정한 재판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장님 재판’은 그리스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신화에 등장하는 ‘정의의 여신’ 디케(Dike)는 두 눈을 가린 채 저울을 들고 있다. 법과 정의를 세우려면 심판 대상의 지위고하를 가리지 말고 엄정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혈연이나 재력·권력에 정의가 굴절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근자에 사법정의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전관예우 개혁에 나선 하창우 대한변협 회장이 이례적으로 법조계의 ‘도장 값’ 치부를 공개했다. 그는 “대법관 출신 변호사가 사건 내용도 모른 채 상고 이유서에 도장만 찍어주고 3000만원을 번다”고 했다. 사실 법원 안팎에는 대법관 출신이 담당 판검사에게 전화 한 통 거는 대가로 5000만원을 받는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심지어 퇴임 후 수년 내에 100억원을 모으지 못하면 바보라는 소리까지 나오는 판이다. 전관과 현관 사이의 끈끈한 유착 없이는 불가능한 일임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도장 값은 우리 법조계의 어두운 풍속도를 대변한다. 신화 속에서와는 달리 서초동 대법원 로비의 디케 동상은 눈을 뜬 모습이다. 두 눈을 부릅뜨고 실체적 진실을 가리겠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정의는 수렁에 빠지고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논란이 꼬리를 문다. 사람들은 드디어 여신의 눈까지 의심한다. 안타깝다! 여신의 눈길이 머문 곳은 정의를 가늠하는 저울이 아니라 황금알을 낳는 ‘도장’이었나? 육신의 눈을 감고 양심의 눈을 밝힌 장님 판사의 혜안이 부럽다.

배연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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