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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시집 ‘기차는 꽃그늘에 주저앉아’

입력 : 2015-03-26 14:07:00 수정 : 2015-03-26 14: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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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년 시력에서 시집에 거두지 못했던 짧은 시들을 모아 펴낸 김명인 시인. 그는 “내 시의 고아들과 함께 살아갈 거처를 마련했으니 근거를 잃었던 이전의 시간들도 여기 고여 새삼 애틋하다”고 썼다.
꽃들이 환하게 만발하여 방석이라도 깔아놓은 듯한 시골 간이역쯤이었을 것이다. 낮은 역사와 키높이가 같은 녹슨 기차가 철길에 버려져 있다. 정오의 햇살 뜨거워 꽃그늘 속에서 졸다 가만히 깨어보니 이승은 억겁의 세월 윤회로 떠돌다 잠시 들른 정거장 같다. 아무리 같은 풍경을 놓고 설명해본들, 시인의 언어를 따라갈 수 있을까.

“졸음기 그득 햇살로 쟁여졌으니/ 이곳도 언젠가는 한 번쯤은 와 본 풍경 속이다/ 화단의 자미 늦여름 한낮을 꽃방석 그늘로 펼쳐 놓는데/ 작은 역사는 제 키 높이로 녹슨 기차 한 량 주저앉히고/ 허리 아래쪽만 콱 깨물고 있다, 정오니까/ 나그네에겐 분별조차 고단하니 기다리는 동안/ 나도 몇만 톤 졸음이나 그늘 안쪽에 부려 놓을까?/ 불멸불멸 하면서 평생 떠도느라 빚졌으니/ 모로 고개 꺾은 저 승객도 이승이란 낯선 대합실/ 깨어나면 딱딱한 나무 의자쯤으로 여길 것인가”(‘기차는 꽃그늘에 주저앉아’)

김명인(69) 시인은 이 명편을 빚어놓고도 정작 그동안 시집에는 수록하지 않았다. 그는 한 권의 시집을 ‘수습’하다 보면 ‘열외된 시편들’이 불가피하게 생겨난다고 했다. 첫 시집 ‘동두천’을 묶을 때도 등단 초기 몇 년간의 작품들을 모두 버렸고 심지어 등단작인 ‘출항제’(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조차 시집에 거두지 못했다고 한다. 각 시집마다 일관된 정조를 고려했거나 혹은 시인의 지나친 염결성 때문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묵힌 시들이 많았다. 그가 등단 40여년을 지나면서 흩어진 시들을 정리하다가 뒷전에 남은 그 시편들을 살펴보았더니 공교롭게도 10행 전후의 시들이 대부분이었다. ‘기차는 꽃그늘에 주저앉아’(민음사)는 이 시들을 모아 펴낸 시집이다.

2001년부터 15년 동안 썼던 시를 5년 단위로 묶어 3부로 나누었다. 그가 돌아보기에 이 시기는 대체로 허무와 죽음에 함몰된 시의식이 지배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기는 체험의 직접성에 몰두했고, 2기는 풍경의 배후에 도사린 그늘을, 최근 5년은 현상보다 심층에 관심을 기울인 시기였다. 그는 특히 풍경을 묘사하고 그 이면을 시인만의 소회로 받아들이는 데 탁월한 것 같다. ‘여우비’는 ‘풍경의 배후’를 묘사한 전형이다.

“엉엉 울 일 아니라는 듯 입술 걸어 잠그고/ 고개까지 젖히며 애써 소나길 가두지만/ 빗방울 매달지 않아도 이내 깔리는 눈자위엔/ 속울음 그렁그렁 번져간다/ 푸른 뒤축 재게 밟으며 구름 그늘로 햇살 덮으며/ 거뒀다 폈다 산등성일 쓸고 가는 저 안절부절/ 마침내 속엣것 다 쏟아내는 노을로 주저앉았구나!/ 오늘은 두 마음이 함께 놀았으니/ 이 비 잠깐 스쳐 간 것이지, 어느새/ 활짝 트인 하늘 한 폭 서산마루에 올려놓는다” 

잠시 비가 내리다가 금방 그치고 환한 햇빛이 비치는 날이 있다. 변덕쟁이 같은 그 비를 여우비라 하거니와 시인은 ‘마침내 속엣것 다 쏟아내는’ 울음 같은 비로 보았다. 입술 걸어 잠그고 참고 참았다가 속울음 번져나가 더 이상 막을 수 없을 때 토해낸 짧은 울음이 여우비란다. 이런 풍경은 또 어떤가. 모든 이별이 긴 대하소설인 줄 알았더니 후박나무 잎들이 후두둑 나무와 이별하는 모습을 보니 손바닥만 한 짧은 장편(掌篇)이었다고 시인은 쓴다.

“후박나무 키 낮춘 손들이/ 가을 한때를 흔들어 보내고 있다/ 나는 모든 이별이/ 천편일률 장편(長篇)인 줄 알았다/ 바람이 잎맥을 들쑤시자/ 사연이 휘는지/ 손등을 뒤집는 저 자리/ 자디잔 그늘을 토닥거리는/ 각양각색 짧은 이별들!”(‘장편掌篇’)

김명인은 “수백 행을 낭비하는 시가 있듯이 단 몇 행으로도 장강을 이뤄 바다에 닿는 절창이 존재하는 것”이라며 “시는 형식에 담기지만 무언가에 가둬졌다고 느끼는 순간 시체처럼 뻣뻣해지므로 형식 또한 내용을 건사하는 한갓진 관(棺)은 아니다”고 말한다. 시의 숙명으로 말하자면 “시어가 형식을 고르고 시는 써진다”고 본다면서도 “오늘의 서정시에서 형식은 시의 미학과 관계없는 잣대로 잘못 재단되고 있다”고 걱정한다. 그는 “들키는 슬픔도 없이 피투성이 전망도 없이/ 요설의 새벽에 가닿는 것이 나의 시일까?”(‘눈보라’)라고 짐짓 자책하지만 자칫 고아로 만들 뻔 한 짧은 시들을 모아놓은 이번 시집은 충분히 의미를 부여할 만하다. 시집에 내리는 이런 봄비는 어떤가.

“산 아래 여인들은 제 몸의 묘상에 새싹 틔우려고/ 아름드리 통나무를 싣고 돌아올 사내들/ 기다린다, 빗소리에 물오른 낮잠/ 지레 젖는 줄 모르고”(‘봄비’)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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