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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감정, 법적 잣대가 돼선 안된다

입력 : 2015-03-21 01:36:59 수정 : 2015-03-21 01:3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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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자 신상 공개 등 낙인찍기 일반화
법률적 판단 ‘국민감정’ 고려한 경우 많아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한 판사는 도둑질한 사람에게 “전 절도죄로 보호관찰을 받고 있습니다”라고
적힌 셔츠를 입고 다니도록 명령했다. 플로리다주 법원에서는 음주사고를 일으킨 사람에게 ‘음주운전 유죄 판결’이라고 쓰여진 스티커를 자동차 범퍼에 붙이도록 했다. 텍사스나 아이오와 등 다른 주에서도 비슷한 스티커들이 처벌 방법으로 시행되고 있다. 범법자에게 공개적으로 수치심을 주는 이런 처벌은 벌금형이나 금고형의 대안으로 미국 법원에서 일반화하는 추세다.


마사 너스바움 지음/조계원 옮김/민음사/3만원
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마사 너스바움 지음/조계원 옮김/민음사/3만원


외설금지법 논쟁이 일었던 1973년 미 연방대법원 판사 워런 버거(Warren Burger)는 음란물 판단에 대해 “당대의 공동체 기준을 지닌 평균적인 사람이 문제가 되는 저작물에서 느낄 수 있는 혐오와 불쾌감을 참조해 정의돼야 한다”는 내용의 판결문을 냈다. 버거 판사는 혐오의 정의를 명확히 하기 위해 음란이라는 말이 불결함을 뜻하는 라틴어 ‘caenum’에서 왔다고 어원까지 판결문에 포함했다.

세계적인 법철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인 마사 너스바움(68·사진) 미 시카고대 석좌교수가 쓴 신간 ‘혐오와 수치심’은 감정이 실생활에서처럼 법에서도 두드러지고 있는 최근 현상에 착안했다. 법을 제정하고 집행하는 과정에서 혐오나 수치심을 포함한 감정이 어떤 역할을 하며,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설명한다. 감정은 비합리적이므로 법률을 만들 때 감정을 고려하면 오류를 초래할 뿐이라고 단정짓는 게 일반적이다. 감정이 아니라 이성에 근거하는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는 데 대중적인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저자는 이런 손쉬운 선택은 잘못이며, 무엇보다도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 법은 생각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혐오나 수치심에 경도된 법체계는 더욱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너스바움은 장자크 루소(1712∼1778)의 유명한 말을 인용한다. “왜 왕들은 자신의 신민들에게 연민이 없는가? 그들(왕들)은 자신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런 의미에서 동정심, 슬픔, 두려움, 분노 같은 감정은 우리 모두가 지닌 인간성을 상기시키는 본질적이고 소중한 신호라고 설명한다. 겉으로 표출되는 인간 감정은 즉흥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사 너스바움은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혐오 같은 감정들을 법 제정이나 집행에 개입시켜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내가 추구하는 것은 인간성을 감추거나 회피하지 않는 사회이며, 자신이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취약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전능함과 완전함을 과도하게 추구하지 않는 시민사회”라고 말한다.

국가는 정치적·법률적 판단에서 ‘국민감정’을 고려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일은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우리 법조계 일각에서는 국민감정을 고려하는 건 불합리하다는 비판이 없지 않다. 감정은 대개 무분별하거나 일관성이 없다고 인식되는 탓이다. 우리나라나 미국에서 정책이나 법은 감정을 배제한 이성과 논리의 결정체로 이해돼 왔다. 저자는 이런 통념에 반기를 든다. 정치나 법 체계가 인간 감정 토대 위에 서 있다는 게 저자의 일관된 주장이다. 나아가 감정은 인지적 내용을 갖고 있으며 지극히 논리적이라고 강조한다.

‘김영란법’을 제안한 김영란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는 서평에서 저자 주장을 쉽게 풀이했다. “감정을 배제한 순수한 법률 세계는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혐오와 수치심은 분노나 두려움과는 달리 개인 존중과 자유를 가로막는 제도적 토대로 이용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너스바움은 ‘지배하기보다는 상호 의존하는 관계를 즐길 수 있는 능력’과 ‘자신과 다른 사람의 불완전성과 유한성을 인정할 수 있는 능력’을 증진시켜 불평등하고 위계적인 사회관계를 줄여 나가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비슷한 견해를 밝혔다. 조 교수는 “불완전한 우리가 사는 이 불완전한 세상에서 차별, 배제, 억압이 아니라 평등, 존중, 호혜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법과 제도 뒤에서 작동하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감정들을 직시하고 이와 대결해야 한다. 이 책은 ‘제도적 민주화’ 이후 우리에게 절실한 ‘감정적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철학적 토대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옮긴이 조계원씨도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의 공격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다. 공격성이 자신의 약함을 감추려는 욕구를 반영한다는 너스바움의 분석을 고려한다면, 한국 사회에는 자신이 처한 어려움을 이해받지 못하는 개인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 책은 이성적 판단을 최우선 잣대로 여기는 국내의 법 집행자들에게 매우 유용한 참고서가 될 만하다. 너스바움은 미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가 해마다 뽑는 세계 100대 지성에 세 차례(2005·2008·2010년) 이름을 올렸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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