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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미의 ‘짜이 한잔’] 척박한 이 땅에도 생명의 움직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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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3-19 21:23:43 수정 : 2015-03-19 21: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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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칭짱열차를 타고 티베트로 향하다
동물들은 물을 찾아서 헤맨다.
이번 여행이 시작된 곳은 중국 베이징이다. 일주일 후 출발하는 베이징행 비행기 편도표를 예매했다. 그러고 나서 여권을 살펴보니 중국 비자도 받지 않았다. 출발하는 비행기표만 있으면 될 줄 알고 무작정 표를 사버린 것이다. 생각이 많아지면 떠나기 힘들다. 그냥 편도행만 있으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베이징에서 티베트로 향하는 기차 이름은 ‘칭짱열차’다. 하늘로 향하는 열차인 이 기차는 베이징에서 출발해 티베트 라싸까지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을 달린다. 베이징에는 티켓만 예매해주는 곳이 많아 기차역에 가지 않아도 쉽게 예약할 수 있다. 

며칠 후 칭짱열차에 올랐다. 1인용으로만 쓸 것 같은 작은 테이블과 여기에 걸맞은 작은 의자 네 개가 모여 있다. 내 자리는 창가 쪽이다. 맞은편에는 부부가 앉았고 내 옆에는 할아버지가 자리를 잡았다. 이틀 동안 가는 열차 안에서 직각으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아 여행하는 일이 쉽진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1등석 침대칸은 대부분 외국인이 차지하고, 앉아서 가는 좌석은 티베트 사람이 주로 이용한다. 특별한 이유 없이 좌석 칸을 선택했다. 

앞자리에 앉은 가족 중 아이의 빨간 볼이 인상적이다.
옆자리 할아버지는 고량주를 냄새가 나도록 마시지만, 다행히 복도 쪽으로 다리를 내놓고 약간의 자리를 나에게 내줬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불편할 수밖에 없는 자리다. 자고 일어나도 깜깜한 창문에 비치는 건 내 모습뿐이다. 시간이 지나 아침이 됐을 때는 저절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어둡기만 했던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왔다. 눈을 떠 창밖을 봤을 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황야를 달리는 마차를 탄 것만 같았다. 기차는 천천히 갈 때 나에게 ‘창밖을 봐’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모래 먼지만 날리는데 뭘 보라는 걸까. 

 
푸른 하늘이 나왔을 때도 역시 황색만 존재했다.
기차가 속삭이는 대로 몇 시간 동안 창밖을 바라봤다. 세상에 색깔이 세 가지 정도만 있었던 듯 아주 단순한 색으로만 보이는 모습이다. 창밖 풍경이 단조로운 이유는 그만큼 생각을 비우고 메마른 땅속에 흐르는 생명을 보라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가끔 눈에 띄는 전봇대만이 이곳에도 사람이 산다는 증거일 뿐이다. 

뿌연 하늘과 황색 산을 끝없이 지나갔다.
메마른 산은 끝없이 펼쳐져 있고, 창밖 풍경은 그림처럼 보인다.
석회석밖에 없는 산들은 풀 한 포기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생명이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이곳에 고산 동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동물들은 물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겨울이라서 얼어붙은 물을 핥고 있는 동물들도 눈에 들어왔다. 소처럼 생긴 동물은 ‘야크’다. 가끔 집이 보이고 트럭이 지나가니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독한 고량주 냄새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기차 안에서 지독한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깨달으려면 밖에 나가봐야 한다. 기차가 어느 역에 정차했을 때 바깥바람을 쐬러 나갔다가 오니 그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화장실은 기차를 탄 지 몇 시간 만에 갈 수 없는 곳이 됐다. 세면대에서 대충 씻기만 했다. 거칠어지는 얼굴 때문에 뭐라도 발라보려고 꺼낸 로션은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다. 고도가 높아져 터지기 직전인 로션통처럼 내 배도 화장실에 못 간 탓에 부풀기만 했다. 테이블 한가득 쌓여가는 해바라기씨 껍데기도 이제 낯설지 않다. 모든 것이 다 불편했지만 참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티베트가 쉽게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보이는 앙상한 나뭇가지 속에도 생명은 흐르고 있다.
다음 날 기차 안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들이 속닥거리며 내가 있는 칸으로 몰려왔다. 그녀들 가운데 한 명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중국어와 더듬거리는 영어를 조합해보니 내가 한국인이냐고 묻고 있었다. 그녀들이 몇 칸을 이동해 이곳까지 온 이유는 나를 자기들 열차 칸으로 데려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류다 뭐다 해서 시끌벅적한 요즘 여행 때마다 느끼는 건 문화의 영향력이 대단하다는 사실이다. 라싸에서 태어난 이 학생들은 베이징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고, 지금은 방학이라 집으로 가는 길이란다. 한국 드라마와 노래를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그녀들과 함께 한국 노래를 같이 부르며 시간을 보냈다. 
 
탕구라역은 해발 5000m가 넘는 곳에 있다.

그때 기차가 멈춰 섰고 티베트 학생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탕구라(唐古拉)라는 역이었다. 그곳 높이는 해발 5068m였다. 5000m가 넘는 높은 곳에서는 하늘과 닿은 느낌이 날까. 황색빛만 보던 세상에서 흐린 하늘이 아닌 짙푸른색 하늘을 볼 수 있으니 이곳이 하늘로 가는 기차역이 맞나 보다. 그때 갑자기 머릿속에서 들리는 사이렌 소리가 내가 느낄 수 있는 데시벨을 넘어섰다. 말로만 듣던 고산증이다. 사이렌 소리가 머리 안에서부터 울려 퍼져도 이 멋진 광경을 두고 지나칠 수 없었다. 
몇가지 색으로만 된 세상을 끊임없이 지나갔다.

반복되는 풍경이 지겹지 않은 이유는 끝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꼬박 이틀이 지나도록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씻지도 못했다. 싸온 음식으로 에너지를 보충하면서 보낸 시간이 다 지나갔다. 기차가 마을들을 지나가듯 시간도 언제나 흘러가게 마련이다.

라싸에 도착하자마자 씻고 술을 마셨다. 고산증으로 고생할 때 하지 말아야 할 규칙이 샤워와 술이라고 들었다. 고산증을 경험하면서 두 가지를 다 해버리고 나니 푹 잘 수 있었다. 따뜻한 물줄기의 고마움을 느끼고 침대에 누워서 잘 수 있다는 현실에 고마움을 느꼈다. 일상에서 고마움을 느끼지 못했던 작은 일들이 감사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실 잠들면서도 심한 이명 현상과 두통으로 힘들었지만, 더 견디기 어려운 건 추위였다. 겨울에 티베트를 찾았으니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해 대가를 치르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내일 아침 라싸에서 밝은 햇살을 마주할 상상을 하니 웃으며 잠들 수 있었다.

여행작가 grimi7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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