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정동환(66)은 25년 전을 회상했다. 그는 1990년 처음으로 사뮈엘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를 연기했다. 41세 한창 나이였지만 부조리극의 대명사 ‘고도…’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대본을 처음 봤을 때 ‘한글인데 왜 이렇게 안 읽히지’ 싶었다. 연습을 거듭하고서야 작품의 ‘조리’가 와닿았다. 그해 10월 그는 베케트의 고향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고도…’를 열연했다.
배우 정동환은 “블라디미르는 이성적인 사람”이라며 “우리 삶에 어디서 오는지 모를 희망이 있듯이 블라디미르는 약속을 기다리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서상배 선임기자 |
그후로 꼭 25년 만에 정동환이 다시 블라디미르로 관객과 만난다. 그를 비롯해 안석환, 김명국, 이호성 등 그동안 이 작품을 거쳐간 명배우 13명이 뭉쳤다. 산울림극단 임영웅 연출이 ‘고도…’를 초연한 지 45주년, 소극장 산울림이 문을 연 지 30주년이 된 것을 기념하는 자리다. 정동환은 1965년 중동고등학교 1학년 때 연극반에 들어가며 무대와 첫 인연을 맺었다. 그해 전국고교 남녀학생연극경연대회에서 최우수 연기상을 받았다. 연기 공력 50년이 쌓였음에도 그는 지난 1월 초부터 거의 매일같이 연습실에 나온다. 하루 4시간 연습도 모자라 오히려 이 작품을 수백번 해본 후배들에게 ‘네 연습시간 좀 달라’고 할 정도다.
“둘이서 두 시간 반 동안 얘기를 주고받는 작품이라 대사량이 엄청나요. 임영웅 선생 연출에서는 대사만큼 동선도 중요해요. 대본이 100쪽인데, 동선까지 다 외우면 200쪽이 된다고 봐야죠. 이걸 외우고 해석하고 내 생각을 가져야 하니 천하에 없는 천재라도 연습시간이 부족해요.”
“글자로 외우려면 불가능할지 몰라요. 부조리극이 재미있는 게 조리를 뛰어넘는 조리가 있어서예요. 서로 엇박자 나는 얘기를 하는 것 같지만, 엇박자가 아니라 이치에 맞는 얘기를 서로 주장하는 거거든요. 말이 안 되는 말을 하는 것 같은데, 곱씹어보면 그 이상의 말이 없다는 걸 알게 돼요.”
‘고도…’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시골길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고도를 기다리는 내용이다.
“인생이 쉽지 않은 거구나, 그렇다고 어려워서 못 살겠다도 아니구나, 살 만한 가치가 있구나, 이런 것들을 쉽게 얘기한 게 아니라, 베케트답게 품위 있게 얘기한 거죠.”
그는 “우리가 배역을 연기하는지 꿈을 꾸고 있는지, 원작도 인생도 명확하지 않다”며 “기다리는 고도는 내일 온다는데 우리는 오늘밖에 못 산다. 내일은 영원히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지 않을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달리 그는 요즘 연습에 몰입하면서 “모든 걸 다 떠나서, 이 자체로 이 순간이 행복하다”고 밝혔다.
“연극이 모든 걸 다 얘기해 줄 거예요. 인생살이가 어려우니, 어려운 연극이죠. 하지만 세상에 부닥치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잖아요. 다 살아 나가잖아요. 아마 보고 나면 ‘어려운데 왜 재미있지’ 의아해할 거예요.”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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