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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나 인생이나 해답없긴 매한가지… 그래도 다 살아지잖소"

입력 : 2015-03-04 21:17:32 수정 : 2015-03-04 21:4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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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만에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열연 배우 정동환
“무대에 선 지 20분도 안 됐는데 넥타이 끝에서 땀방울이 똑똑 떨어지더라고요. 그때 ‘인생살이 정말 힘들다, 너 끝날 때까지 갈 수 있겠어?’라고 생각했어요.”

배우 정동환(66)은 25년 전을 회상했다. 그는 1990년 처음으로 사뮈엘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를 연기했다. 41세 한창 나이였지만 부조리극의 대명사 ‘고도…’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대본을 처음 봤을 때 ‘한글인데 왜 이렇게 안 읽히지’ 싶었다. 연습을 거듭하고서야 작품의 ‘조리’가 와닿았다. 그해 10월 그는 베케트의 고향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고도…’를 열연했다. 

배우 정동환은 “블라디미르는 이성적인 사람”이라며 “우리 삶에 어디서 오는지 모를 희망이 있듯이 블라디미르는 약속을 기다리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서상배 선임기자
현지 언론 아일리시 타임스는 1면 오른쪽 상단에 ‘동양에서 온 고도는 기다릴 가치가 있었다’는 기사를 실었다.

그후로 꼭 25년 만에 정동환이 다시 블라디미르로 관객과 만난다. 그를 비롯해 안석환, 김명국, 이호성 등 그동안 이 작품을 거쳐간 명배우 13명이 뭉쳤다. 산울림극단 임영웅 연출이 ‘고도…’를 초연한 지 45주년, 소극장 산울림이 문을 연 지 30주년이 된 것을 기념하는 자리다. 정동환은 1965년 중동고등학교 1학년 때 연극반에 들어가며 무대와 첫 인연을 맺었다. 그해 전국고교 남녀학생연극경연대회에서 최우수 연기상을 받았다. 연기 공력 50년이 쌓였음에도 그는 지난 1월 초부터 거의 매일같이 연습실에 나온다. 하루 4시간 연습도 모자라 오히려 이 작품을 수백번 해본 후배들에게 ‘네 연습시간 좀 달라’고 할 정도다.

“둘이서 두 시간 반 동안 얘기를 주고받는 작품이라 대사량이 엄청나요. 임영웅 선생 연출에서는 대사만큼 동선도 중요해요. 대본이 100쪽인데, 동선까지 다 외우면 200쪽이 된다고 봐야죠. 이걸 외우고 해석하고 내 생각을 가져야 하니 천하에 없는 천재라도 연습시간이 부족해요.”

그의 말대로 ‘고도…’의 대본은 처음 봐서는 외워지지가 않는다. 큰 사건이나 줄거리 없이 두 인물이 ‘날뛰어봤자 소용없는 일이지/타고난 대로니까/꿈틀거린다고 별 수 있니?/근본이야 달라지지 않는 거지/ 별 수 없는 거야’ 식으로 짧은 대사를 주고받는다.

“글자로 외우려면 불가능할지 몰라요. 부조리극이 재미있는 게 조리를 뛰어넘는 조리가 있어서예요. 서로 엇박자 나는 얘기를 하는 것 같지만, 엇박자가 아니라 이치에 맞는 얘기를 서로 주장하는 거거든요. 말이 안 되는 말을 하는 것 같은데, 곱씹어보면 그 이상의 말이 없다는 걸 알게 돼요.”

‘고도…’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시골길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고도를 기다리는 내용이다. 

고도를 왜 기다리는지, 언제 어디서 만나는지, 누구인지조차 불확실하다. 정동환은 “25년 전에도 소홀하지 않았지만 이만큼 살아보니 ‘그때는 40대의 내가 본 고도일 수밖에 없었겠구나’ 싶다”며 “이제 연기에 불필요한 힘을 빼니 오히려 체력적으로 편하다”고 말했다. 그는 작품 속 기다림이 남의 얘기가 아닌 관객 자신의 얘기임을 어떻게 하면 더 와닿게 할까 고민 중이다. 이순을 훌쩍 넘긴 그가 바라보는 ‘고도…’의 의미는 무엇일까.

“인생이 쉽지 않은 거구나, 그렇다고 어려워서 못 살겠다도 아니구나, 살 만한 가치가 있구나, 이런 것들을 쉽게 얘기한 게 아니라, 베케트답게 품위 있게 얘기한 거죠.”

그는 “우리가 배역을 연기하는지 꿈을 꾸고 있는지, 원작도 인생도 명확하지 않다”며 “기다리는 고도는 내일 온다는데 우리는 오늘밖에 못 산다. 내일은 영원히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지 않을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달리 그는 요즘 연습에 몰입하면서 “모든 걸 다 떠나서, 이 자체로 이 순간이 행복하다”고 밝혔다.

그는 이 작품에 선뜻 참여했지만, 가벼운 결정은 아니었다. 훨씬 경제적 보상이 많은 기회를 택할 수도 있었고, 대학 강단에 서던 일도 내려놓아야 했다. 그는 무엇보다 “나이 들수록 (연기하면서) 생각이 복잡해지니 정신적으로 굉장히 어렵다”며 “체력까지 안 받쳐주면 작품하다가 쓰러지겠다 싶은 두려움이 근간에 있었다”고 밝혔다. 이쯤되면 떠나보낸 버스를 떠올리며 후회할 법한데 그는 “거꾸로 더 행복한 게 놀라울 정도로 좋다”고 했다. 그가 관객에게 당부한 말은 “아무 준비 없이 오라”였다.

“연극이 모든 걸 다 얘기해 줄 거예요. 인생살이가 어려우니, 어려운 연극이죠. 하지만 세상에 부닥치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잖아요. 다 살아 나가잖아요. 아마 보고 나면 ‘어려운데 왜 재미있지’ 의아해할 거예요.”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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