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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근칼럼] 명절 음식의 준비와 사회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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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2-22 21:43:17 수정 : 2015-02-23 00:3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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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준비’ 논의 초점은 고통의 분담
구체적 사안서 정의 찾고 실현해야
설날과 추석이 다가오면 언론에는 예상되는 가족의 갈등을 막으려는 기사가 많이 나온다. 취업준비생과 과년한 자식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이 지침으로 나온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단골 주제는 차례 상을 준비해야 하는 여성들의 고통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요즘 남자가 부엌에 출입하는 것 자체는 물론이거니와 부엌에 어슬렁거리는 것마저 큰일인 양 목소리를 높이는 어른들이 많이 줄어들었다. 반면 여성이 명절 음식을 준비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남성이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거나 남자끼리 술상 앞에서 근황 토크를 즐기는 일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그래서 명절을 앞두고 ‘주부우울증’이니 ‘명절증후군’이 하는 말이 지면을 장식한다.

지금까지 명절증후군은 우리나라의 남성과 여성의 성 역할 차이나 가부장 문화의 유습으로 간주돼 왔다. 남성은 가정 밖의 일을 하고 여성은 가정 안의 일을 하므로, 차례 음식을 여성이 도맡아 하게 됐다는 말이다. 취업이든 육아든 교육이든 오늘날 아내의 활동 영역을 가정 안에만 묶어둘 수가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성 역할과 가부장 문화의 전통이 아무리 유구하다고 하더라도 진지하게 재검토해볼 만하다. 이러한 요구가 20세기 후반부터 꾸준히 제기됐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주부우울증’ 현상이 없어졌다는 보고가 없다면, 이 현상을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명절날 음식 장만과 가사노동의 분담은 정의 차원에서 다룰 만하다. 정의는 보통 한 사회의 자원과 이익을 공정하게 배분하는 맥락에서 다루어진다. 공정으로서 정의는 추상적인 차원에서 이야기되므로 구체적인 현실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분명하지 않다. 2010년에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우리말로 번역 출간됐다. 이 책이 공전의 히트를 치자 인기의 원인을 분석하는 글까지 나왔지만 정의가 아주 구체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신정근 성균관대 교수·동양철학
책을 펼치면 2004년 여름 허리케인 찰리가 플로리다 지역을 초토화시킨 이야기가 나온다. 허리케인이 지나간 뒤 어느 주유소는 평소 2달러에 팔던 얼음주머니를 10달러에 팔고, 어느 상점은 평소 2000달러에 팔던 가정용 소형 발전기를 2만3000달러를 불렀고, 77살의 할머니는 나이 든 남편과 장애가 있는 딸을 데리고 모텔에 묵었다가 평소 40달러의 방세 대신 160달러를 지불해야 했다. 이러한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가격 폭리의 논쟁이 일어났다. 남의 불행을 미끼로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받는다는 주장과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상황에서 가격 인상은 합당한 경제행위라는 주장이 첨예하게 맞섰다. 정의가 이렇게 구체적인 상황으로 논의되면 모든 사람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목소리가 하나로 정리되면 그것을 법으로 제정해 정의가 살아있는 사회를 기획할 수 있게 된다.

명절의 음식 장만을 두고 법안을 만들자고 하면 과잉 대응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허리 휘게 일해야 하는 여성들은 법안 발의에 찬성할지도 모른다. 법안의 제정 여부를 논하기 이전에 차례 상을 준비하는 일을 어떻게 공정하고 행복하게 할 것인지 논의가 필요하다. 이러한 논의는 추상적인 담론이 아닌 만큼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다. 이때 명절 준비는 이익의 배분보다 고통의 분담에 초점이 있다.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음식을 마련할 필요가 없다. 제사를 지내려면 누군가 일을 해야 한다. 여성이 일해왔으니까 계속 일을 해야 한다고 하면, 우리는 과거로부터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도 정의롭지도 못한 상태에 살게 된다. 집안마다 명절의 노동을 어떻게 정의롭게 하느냐는 주제를 두고 자유롭게 끝장 토론을 벌일 만하다. 이 토론은 감정에 사로잡혀 버럭 화를 낼 일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안에서 정의를 찾고 현실에서 실현해 ‘모두가 웃을 수 있는 명절’을 만드는 필수 절차라고 할 수 있다.

신정근 성균관대 교수·동양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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