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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어느 장면에 우느냐”다. 할머니가 가슴에 묻은 아이 여섯 명의 내복을 살 때, 할아버지가 자신의 거친 기침소리에 지쳐 새벽녘에 겨우 잠든 할머니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을 때,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옷을 아궁이에서 태울 때, 할머니가 산소 옆에서 “이제 누가 우리 할아버지 챙겨주나”라며 독백할 때 영화관은 주르륵 흐르는 눈물 소리가 시냇물이 돼 흘러 넘쳤다. 사람은 늙고 병들고 죽는다. 그럼에도 가슴이 저린 것은 우리 모두가 인간이기에 그럴 것이다.

할머니의 생일 날 케이크를 자르고 노래도 부른다. 아들에 딸에 손녀들까지 모여 화기애애하다. 노부부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그러나 어쩌랴. 행복은 잠깐이다. 각박한 현실은 선하디선한 산골 노부부를 피해가지 않는다. 장남과 큰딸이 부모님 모시는 문제로 싸우기 시작하고, 할머니 눈에 눈물이 고이고 할아버지는 먼 산을 그저 물끄러미 쳐다본다. 이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그 가슴 아픈 현실성이 전류처럼 온몸을 파고든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 장면에서 특히 많이 울었다. 안 우는 척하려고 손을 호주머니에서 빼지 않은 채 버텼지만 눈물은 어찌 손 쓸 새도 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동물 중에 웃는 것은 인간뿐”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 웃음은 예로부터 고급이고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우는 것은 동물의 조건반사적이라는 견해도 있다. 감성적이고 약해 보이는 측면도 있다. 우리가 어릴 때 “사나이는 평생 세 번 운다”는 식의 강한 남자 교육을 받고 자란 것은 이 때문이다. 방송인 김구라가 얼마 전 TV에서 자신은 어떤 영화를 봐도 울지 않는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울면 지니까!”라고 답했다. 김구라가 쓰러진 것은 강한 남자 교육의 후유증이 아닐까. 운다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울어야 할 때 우는 것, 그게 인간의 본성에 맞는 삶일 것이다.

영화 속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봄에 꽃이 피면 참 이뻐. 거기서 딱 멈추면 좋은데 가을 되며 서릴 맞고 떨어진다 말이야. 다 헛 게 돼.” 철학개론만 읽고는 깨칠 수 없는 경지다. 삶은 마냥 봄날만 있는 게 아니다. 꽃도 폈다 지고 열매도 달렸다 떨어지는 것이 인생이다. 이룬 것도 없는데 또 한 해가 가고 있다. 석양을 보며 운다고 해서 누가 나무라겠는가.

백영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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