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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다운(거위털) 점퍼를 장만했다.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라 구스다운 점퍼를 눈여겨보던 차에 홈쇼핑에서 맘에 드는 제품을 발견하고 냉큼 질렀다. 질렀다고 하기 민망할 정도로 가격은 합리적이었다.

드디어 받아본 구스다운 점퍼는 빵빵하고 폭신했다. 맘에 들었다. 거울을 본 순간, 모자 끝부분에 북슬북슬 달린 털이 눈에 들어왔다. 비싼 점퍼가 아닌지라 인조 털이라고 생각했는데 옷 안쪽 태그를 확인하니 ‘천연 라쿤털’이란다. 요즘 대세인 리얼 라쿤. 문득 몇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김희원 국제부 기자
‘라쿤이 너구리던가.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그러고 보니 이 거위털은….’

며칠 뒤 라쿤털 채집 과정을 담은 EBS방송 프로그램을 보게 됐다. 궁금증이 풀린 동시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라쿤은 미국 너구리다. 미국의 어느 마을을 배회하던 라쿤은 달달한 마시멜로 냄새를 따라가다 덫에 걸린다. 다음 날 사냥꾼의 총에 숨이 끊어지고 가죽이 벗겨진다.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듯 사냥꾼이 겨눈 총구를 작은 앞발로 밀어내던 라쿤의 모습에 눈을 질끈 감았다. 더욱 참담한 사실은 그 라쿤은 비교적 윤리적인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모피를 대량 생산하는 중국 공장에는 죽은 라쿤들이 TV 화면에 다 잡히지도 않을 정도로 길게 줄지어 누워있다. 털 채집 과정은 끔찍하고 보관·가공 과정은 비위생적이다. 그 라쿤들 가운데 한 마리의 털이 내 점퍼의 모자 끝에 달리게 됐으리라.

라쿤털뿐만 아니라 최근 사람들이 소비하는 대부분의 모피가 이런 채집 과정을 거친다. 거위 털은 원래 털갈이로 빠진 것을 사용했으나 최근 구스다운 점퍼 수요가 폭발하면서 멀쩡히 살아 있는 거위들의 가슴털을 사정없이 뽑아 만들게 됐다. 앙고라 토끼도 수없이 털을 뽑히며 혹사당한다. 털을 뽑거나 가죽을 벗기지 않고 깎아 사용하는 양, 캐시미어(산양), 알파카 등도 공장에서 마구잡이식으로 생산하는 과정에서 상처 입기는 마찬가지다.

고백하자면 몇 년 전 앙고라털 채집 동영상을 보고 ‘웬만하면 모피는 소비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구스다운 점퍼를 구매하면서 ‘따뜻하겠지’하는 생각 외엔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았다. 옷 전체가 풍성하게 덮인 것만 모피의류로 생각하고 합성섬유 속에 숨은 구스다운이나 모자 끝에 살짝 달린 라쿤 털 정도는 괜찮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했던 것 같다.

가볍고 따뜻한 모피냐, 따뜻할수록 무거워지는 합성섬유냐. ‘윤리적 채집과정’을 거쳤다는 유럽산 모피냐, 같은 기능에 가격이 저렴한 중국산 모피냐. 나만의 윤리적 겨울옷 소비 기준을 정하려고 고민 중이다. 비윤리적인 동물권 침해 실태를 알고 나면 거부감이 들지만, 가볍고 따뜻한 옷을 포기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대다수 소비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선택은 개인의 몫이다. 하지만 모피를 대체할 수 있는 겨울옷 소재가 다양해져야 소신 있는 선택이 가능해진다. 요즘은 동물의 눈물이 담긴 모피가 들어 있지 않은 옷을 찾기가 어렵다.

김희원 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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