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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30년째 꾸준히 나가는 모임이 있다. 한 동네에 살았던 ‘아줌마’, ‘이모’들이 멤버다. 동네 골목길을 누비던 아이들이 결혼해 자녀를 둘 만큼 시간이 흘렀고 몇 차례 이사 다니며 같은 동네 주민이라는 연도 끊어졌지만, 한번 깊어진 이웃의 정이 이어지고 있다. “은행 근처 일식집이 없어졌더라. ○○네 큰아들은 벌써 둘째를 낳았다더라.” 모임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으면 유년기의 추억을 떠올리곤 한다. 골목이 마치 야구장, 축구장인 양 뛰어놀다가 누군가 “이놈들, 이렇게 늦게까지 밖에서 놀면 망태 할아버지가 잡으러 온다”고 외치면 집으로 뿔뿔이 흩어지던 모습들.

내게서 이웃이 사라진 건 고등학생 때 이후 집이 몇 차례 이사를 다니면서다. 결혼 전 2년간 살았던 아파트에서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학교 동창이나 사회생활을 하며 만난 이들과는 시시때때로 만나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도 정작 같은 공간에 사는 사람들과는 안면조차 트지 못했다.

유태영 국제부 기자
지금 사는 곳의 삶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같은 층 노부부와 마주치면 간혹 인사를 건넬 뿐, 주민들과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고도 인사를 하기는커녕 벽에 붙은 광고나 애꿎은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리며 애써 시선을 피하기 일쑤였다. 문 밖에 놔둔 짐이 바람에 날려 복도에 나뒹굴자 누군가가 “불쾌하다. 주의해 달라”고 항의쪽지를 남긴 일 정도가 이웃 간 교류(?)의 전부였다. 윗집의 쿵쾅거리는 소리, 아랫집에서 올라오는 담배 연기에 아내가 스트레스를 받아도 “내버려 둬, 밤새 저러진 않겠지” 하고 말았다. 대화로 불편함을 풀 수 있으리라는 기대보다 이웃 간 다툼이 칼부림으로 번질 정도로 삭막해진 요즘 이웃관계가 떠올라서였다. 오죽하면 연쇄살인을 다룬 웹툰 제목이 ‘이웃 사람’일까.

변화가 생긴 건 여름에 아이가 태어난 이후다. 보채는 아이를 안고 복도를 서성거리며 달래다 보면 이웃과 마주치는 일이 생기곤 했다. “아들인가요, 딸인가요.” “몇개월이나 됐나요.” 단순한 대화가 몇 번 오가고 나서 같은 층에 아직 돌이 안 된 신생아가 5명이나 산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내는 이내 이웃 아기 엄마들과 친해졌다. 출근해서 일하다 보면 아내한테서 ‘오늘은 쌍둥이네서 놀다 왔어’, ‘△△이네랑 같이 산책 갔다 왔어’라는 문자메시지가 오곤 한다. 첨부된 사진에는 아이가 두 살짜리 옆집 누나 앞에서 장난감을 빼앗길까봐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웃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자 고된 육아생활에 지쳐가던 아내도 활력이 생기는 듯했다. 퇴근 후 집에 들어가면 못 보던 장난감이나 처음 보는 음식이 놓여 있기도 했다. “우리 애는 이제 이거 안 갖고 놀아요.” “친정 어머니가 왔다 가셨어요, 한 번 드셔 보세요.” 이웃이 두고 간 것들이다.

먹고살기 바쁘다, 세상이 각박해졌다, …. 모두 입에 발린 핑계임을 깨달았다. 그저 환한 미소와 “안녕하세요” 한마디면 삶이 이렇게 풍부해질 수 있는데.

유태영 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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