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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의 할머니가 시청을 찾아왔다. 한참을 쭈빗거리더니 직원에게 손때 묻은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 안에는 꼬깃꼬깃한 만원짜리 10장이 들어 있었다. 할머니는 “적은 돈이라 내놓기 부끄럽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렇게 네 번이나 더 ‘부끄러운 돈’을 내놨다. 그 돈은 거동이 불편한 몸으로 병원비까지 아껴 마련한 돈이었다. 작년 이맘때 세모를 따뜻하게 달군 속초 신계향 할머니의 이야기다.

신 할머니가 기부를 시작한 것은 순전히 연탄 때문이다. 30여년 전 집 앞에 누군가 연탄 200장을 몰래 갖다 놓았다. 어려운 형편에 그냥 쓸 수밖에 없었던 할머니는 평생의 짐으로 마음에 담아 두었다. 훗날 할머니는 먼저 떠난 남편의 산소 앞에서 그때의 은혜를 꼭 갚겠다고 다짐했다. “신기하게도 매달 기부하고 돌아가면 그날 밤 꿈에 남편이 나와요.” 신 할머니의 환한 미소가 보름달처럼 밝다.

얼마 전 경기도 동두천의 한 주민센터에선 100만원이 든 봉투 하나가 전해졌다. 겉봉에는 ‘연탄 기부해 주세요. 할머니가’라는 글씨만 적혀 있었다. 성도 이름도 없었다. 익명의 기부자는 성금조차 직접 전달하지 않았다. 문 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아마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알까봐 그토록 전전긍긍했나 보다.

경기의 한파가 유독 매서운 요즘, 연탄 기부운동이 뜨겁다고 한다. 어느 초등학교의 고사리 손들은 기부 물품을 팔아 모은 돈으로 가난한 이웃에 연탄을 보냈다. 한 중학교에선 용돈 10% 기부운동을 벌였고,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는 혼수비용을 연탄은행에 기부했다. 이웃의 시린 발을 녹여주는 ‘인간 난로’의 따뜻한 풍경이다.

어느 시인은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이라고 노래했다. 연탄은 자신의 몸을 발갛게 태워 세상을 데운다. 까만 육신은 끝내 하얀 재로 변한다. 그렇게 죽어서도 사람들이 빙판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길바닥에 뿌려진다. 어디 연탄보다 지극한 살신성인의 도가 세상에 또 있을까.

수필 ‘연탄길’의 작가 이철환은 “우리가 타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바로 마음”이라고 말한다. 그 선물을 주기 위해서는 잠시 자신의 삶을 멈춰야 한다고 작가는 충고한다. 또 한 해가 저문다. 갑오년 고개에 서서 삶을 돌아본다.

배연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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