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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언어로 말은 하지만… 대화와 소통은 없는 배려 없는 가족의 모습

입력 : 2014-11-20 21:16:54 수정 : 2014-11-20 21: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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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가족이라는 이름의 부족’
언어는 불완전하다. 언어에 기댄 인간의 소통 역시 덜컹댈 수밖에 없다. 가장 끈끈하다 여겨지는 가족이나 연인이라고 다를 건 없다. 오히려 ‘우리는 가족’이라고 당연시하는 사이 더 무신경해지기도 한다. 연극 ‘가족이라는 이름의 부족’(사진)은 언어의 속성을 파고들며 가족의 본질을 통렬하게 들여다본다. 극은 느리지만 밀도 높게 갈등 수위를 높여가다가 응축된 감정을 폭발시킨다. 순간 낮은 한숨이 무겁게 공기를 짓누른다. 입체적·상징적 인물들이 적재적소에 쏟아놓는 대사들이 마음을 헤집는다.

객석에 불이 꺼지자마자 불협화음이 울린다. 이 연극에서 등장할 가족의 모습을 함축적으로 암시하는 첫 장면이다. 배경은 미국. 아빠 크리스토퍼(남명렬), 엄마 베스(남기애)에 딸 루스(방진의), 아들 다니엘(김준원)과 빌리(이재균)가 한 지붕 아래 살고 있다.

가족들은 책과 논문을 들먹이고 고상한 단어를 동원해 수다를 떤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다들 자기 얘기 하기에만 바쁘다. 비아냥과 직설, 은유가 난무하지만 대화는 없다. 빌리는 이 말의 난장판에서 홀로 조용하다. 청각장애인인 빌리는 가족의 입술을 읽어서 대화를 이해하고 보청기를 낀 채 말한다. 수화는 배운 적이 없다. 가족들은 빌리를 비장애인처럼 취급한다.

가족 구성원을 보면 이렇다. 아빠는 언어 신봉자다. 그는 “감정은 말로 표현해야 하는 거야”라고 단언한다. 논리적·철학적이어서 모든 일에 주석을 단다. ‘옳은 소리’만 하는 그는 당연히 입으로는 배타성을 비판하지만 가장 독선적이고 편협하다. 아들의 여자친구는 ‘북부 출신’이어서 안 되고 “청각장애가 정체성의 중심에 있는 순간 끝”이라며 아들의 장애를 부정한다.

엄마는 모든 일에 “그럴 수도 있지”라며 공감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는 추리소설을 쓰며 남편과 다른 허구의 언어를 탐색한다. 다니엘은 아빠의 언어를 부정한다. “언어는 아무 쓸모가 없다. 우리는 모두 지각이라는 자신의 주체성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라는 내용의 석사 논문을 준비 중이다. 그러나 다니엘은 아빠를 닮았다. 동생 빌리를 수중에 놓아야 마음이 놓인다. 루스는 음악이라는 이질적 언어를 택했다. 오페라 가수를 꿈꾸지만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

폐쇄적으로 뭉친 이 가족은 각자 다른 언어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루스가 재능부족에 절망하는 순간 엄마는 기계적인 ‘공감의 위로’만 건넨다. 아들이 환청에 시달리자 아빠는 “환청이 들리면 대마초를 피우지 말아야지”라며 짜증낸다. 보이지 않게 삐걱대던 가족의 일상은 빌리가 청각장애인 여자친구인 실비아(정운선)를 데려오며 쩍쩍 금이 간다. 빌리는 가족들이 실비아의 말을 들으려 귀 기울이는 모습을 보며 그간 자신이 ‘2등급 시민’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가족이 수화를 배울 때까지 말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빌리는 수화를 통해 가족 속에서 부정당했던 장애인으로서 정체성을 찾는다. 그에게 수화는 “무슨 말이든 다 할 수 있는” 마법의 언어다. 실비아는 “감정을 꼭 말로 고정시켜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라며 수화의 무한한 표현력을 보여준다. 연인과 꾸린 새로운 공동체, 수화라는 언어 속에 빌리를 위한 이상향이 있을까.

이 연극은 가족의 한계에 한숨 짓게 만든다. 가장 근원적 관계인 가족·연인조차 소통하기 힘든 모습을 지켜보는 건 씁쓸하고 슬픈 일이다. ‘가족이라는 부족’이 지닌 한계는 결국 ‘인간종이라는 부족’의 한계와 마찬가지다. 인간은 자신의 언어에 갇혀 가족에게 물려받은 오류를 되풀이한다. 비관적으로 흐르던 극은 그러나 마지막에 작은 희망과 함께 ‘소통’의 의미를 돌아보게 만든다. 막대한 분량의 대사와 2시간이 넘는 공연 시간을 소화해내는 배우들의 열연이 돋보인다. 원작은 영국 극작계의 기대주인 니나 레인이 썼다. 내달 14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한다. 3만5000∼5만원.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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