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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이토암살’ 105년 전 LA헤럴드 1면 톱…최초 보도는 AP

입력 : 2014-10-25 13:35:36 수정 : 2014-10-25 15: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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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이 26일로 105주년을 맞는 가운데 당시 미국의 유력 신문이 저격 당일 1면 톱으로 보도한 사실이 확인됐다. 로스앤젤레스 헤럴드는 1909년 10월26일 ‘이토 백작 암살’이라는 제목의 장문기사를 이토의 사진과 함께 프런트면에 실었다.

지금까지 ‘이토 암살’ 뉴스는 미국 신문 중 뉴욕타임스가 가장 빨랐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LA헤럴드 역시 같은 날 속보가 나간 것은 물론, 1면에 대서특필해 눈길을 끌고 있다. 

특히 이 기사는 송고시점이 10월25일이어서 궁금증을 자아낸다. 안중근의사가 이토를 처단한 것은 10월26일 오전 9시께였기 때문이다. 사건이 벌어지기도 전에 결과가 보도되는 ‘예언 특종’이 돼버린 셈이다. LA헤럴드는 당시 16면이 발행된 대형 매체로 한 부당 2센트에 판매됐다.

이 기사는 본래 AP통신이 작성한 것으로 당시 AP의 일본주재기자는 이토 암살 소식을 오후 3시께 송고했다고 밝혔다. 이 시간이 LA 기준으로는 전날 밤 11시경이었기 때문에 송고시점이 10월25일로 표기됐고 10월26일 발행된 것이다.

기사는 충격적인 죽음을 당한 이토가 국제적으로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지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영어권매체 사료연구가인 워싱턴의 문기성씨는 “하얼빈(哈爾濱) 발로 긴급 송고한 뉴욕타임스 기사가 저격 순간과 이토의 최후 등 현장의 생생함을 전했다면 LA헤럴드는 이토가 만주에 간 이유와 한반도 지배, 그로 인한 암살 촉발 등 해설기사 형식을 띄고 있다”고 분석했다.

당시만 해도 안중근의사가 ‘대한의군 참모중장(大韓義軍 參謨中將)’ 자격으로 이토를 처단한 사실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이토백작, 한국인 광신자에 희생’이라는 작은 제목을 달기도 했다. 또 다른 제목으로 ‘일본의 가장 위대한 정치지도자의 피살로 도쿄, 큰 슬픔과 충격에 빠져’라고 소개한 것을 볼 때 미국을 비롯한 서구국가들이 이토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을 취한 것을 알 수 있다.

LA헤럴드는 “일본의 유명정치인 이토 백작이 하얼빈에서 한국인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이같은 흉보는 도쿄 시간으로 오후 3시에 전해졌다. 소식은 이토 백작이 암살됐다는 간단한 내용뿐이다. 도쿄는 큰 슬픔과 충격에 빠졌다”고 기사를 시작했다.

이어 “이토 히로부미 백작은 아마도 신일본의 가장 위대한 정치인이다. 서구인들에게 그는제국주의 헌법을 제정해 일본을 현대적인 문명국으로 가장 먼저 이끈 주인공으로 각인됐다”면서 “황제의 고문이자 헌법에 기초한 국가의 중개자로서 그는 일본을 현재의 위치에 있도록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LA헤럴드는 “68세로 숨진 이토 백작은 일본이 자국민의 외국행을 사형에 처하던 1863년 영국에 유학을 떠난 선구자적 인물이다. 그는 애국심에 고취돼 서구의 패권에 대한 비밀을 알고자하는 열망을 보였고 결국 그의 영국행은 훗날 일본에게 이로운 결과로 입증됐다”고 말했다.

LA헤럴드는 일본 추밀원 의장이었던 이토의 요청으로 만주에서 러시아 재무장관 코콥초프와의 회담이 마련됐으며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고 분석해 눈길을 끌었다. 다음은 관련기사.

“일본추밀원 의장이었던 이토는 10월16일 만주여행을 떠났다. 그는 화요일(26일) 하얼빈에 도착했다, 그는 러시아재무장관 코콥초프와 만나기로 돼 있었다. 코콥초프와의 회담은 일본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으며, 회담을 제안한 정확한 동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코콥초프는 정치적 문제는 논의하지 않는 조건으로 회담에 임했지만 이토는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 일본과 중국과의 합의에 따라 만주철도에 대한 러시아의 지배권에 대항하는 분쟁을 방지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중국은 이토 백작과 대화하기 위해 고위 임원을 하얼빈에 파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토는 일요일(24일) 선양을 통과했다. 이곳은 쉬량 총독과 회담을 한 곳이었다.”

LA헤럴드는 이토가 1870년 금융과 은행시스템을 조사하기 위해 커미셔너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으며 일본에 돌아올 때 공공대신에 임명됐다는 사실도 전했다.

LA헤럴드는 이토가 1880년 청나라의 리훙장(李鴻章)과 조선문제를 놓고 협상을 벌였고 이 조약은 1894년 일본이 청나라와의 전쟁을 합리화하는데 이용됐다고 지적했다. 이어 “나중에 청나라와 평화조약을 맺은 그는 후작에 임명됐고 러일전쟁후엔 조선 통감이 됐다. 조선인들이 원한을 갖게 된 이유다”고 지적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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