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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꾸준함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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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10-19 21:41:14 수정 : 2014-10-19 22: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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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3일이었다. LG 트윈스의 성적은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10승1무23패로 겨우 승률 3할을 맞춘 꼴찌. 4위와 승차는 7.5경기나 벌어져 있었다. 경기가 많이 남았다지만 반등의 기회를 잡기는 힘들어 보였다.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에 분패한 이후 10년간의 암흑기 내내 팬들을 힘들게 했던 ‘희망 고문’(추격하지만 역전에는 실패하기에!)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런 경기가 많아질수록 불펜진 소모가 컸고, 다음 경기의 연쇄 부작용으로 이어졌다. 벤치도 선수들도 여유를 잃어가는 모습이었다. 급기야 감독이 지휘봉을 내려놓고 팀을 떠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갈수록 태산이었다.

그날 홀로 잠실구장을 찾았다. 예매를 취소하려다가, 올시즌에 작별을 고하는 나만의 의식이라고 생각했다. 포기하면 마음은 편해진다. 지하철 안에서 들여다본 스마트폰에는 새로 선임된 양상문 감독의 취임식 기사가 쏟아졌다. 솔직히 큰 기대는 갖지 않았다. 시즌 도중 감독이 바뀌어 팀이 잘된 경우를 본 적이 없다. 그날, 5-0 영봉승이라는 과분한 선물을 안아들고 후련한 마음으로 야구장을 떠났다.

이후 5개월여가 지났다. 막판 부진으로 5할 승률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끝내 가을야구 티켓을 손에 쥐었다. 시즌 초를 떠올려보면 기적 같은 일이다. 감독과 코칭스태프 일부가 바뀌었지만 새로운 전력 보강은 없었기 때문이다. 팀 타율은 여전히 최하위권이고, 외국인 타자가 교체되면서 덩달아 내야 수비진까지 후폭풍을 맞았다. 그런데 위에 있던 5개 팀을 끌어내리고 4위를 꿰찼으니 기적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다.

유태영 국제부 기자
이쯤 와서 되짚어보게 되는 것이 양 감독의 취임 회견 내용이다. 그는 “하나하나 계단을 올라가는 기분으로 멀지만 천천히 가겠다”고 했다. “독한 야구를 하겠다”고도 했다. 덕아웃에 ‘나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하다’라는 슬로건을 내걸며 선수들의 자신감을 고취시키고 몇몇 선수의 보직을 바꿔 강점인 불펜진을 더욱 강화한 것이 변화라면 변화였다. 대신 조금 무리하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경기라도 연투한 투수를 등판시키지 않았다. 소 걸음으로 천리를 걷는 듯한 행보였다. 팬들은 “승부수를 던지지 않는다”며 원성을 쏟아냈지만 불펜은 나날이 견고해졌다. 경기에서 이기고 있을 때는 ‘지킬 수 있다’는 믿음이, 지고 있을 때는 ‘따라잡을 기회가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이는 선발진과 타선의 선순환으로 이어졌다.

서두르지 않고 원칙을 지키며 뚜벅뚜벅 나아가는 것. 그것만큼 어렵고 독한 게 없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누군가의 눈에 야구는 ‘그깟 공놀이’에 불과하겠지만, 내가 30년째 보아 온 야구는 매 시즌, 매 경기가 인생의 축소판이다. 2014년 프로야구에서는 순위, 승차, 승률이라는 숫자에 위축되지 않고 자기 길만 뚜벅뚜벅 걷는 ‘꾸준함의 미학’을 봤다. 남에게 뒤처질까봐 늘 조바심을 내고 하루아침의 ‘대박’을 꿈꾸기도 하는 우리네 삶에 던져 준 의미 있는 화두다.

유태영 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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