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망각력과 복원력 탁월 정치가 한 수 배워야
여야 정치 지도자들 과거 회귀 대신 미래로
모성리더십 발휘해야
월요일 아침, 큰 선물이었다. 골퍼 김효주는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그것도 역전노장 캐리 웹을 상대로 마지막 18번 홀에서 대역전극을 펼쳤다.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는 쾌거였다. 어느 누가 감히 이런 감동의 드라마를 상상이나 했는가.

김효주의 힘은 크게 보면 두 가지다. 첫째, 망각력(忘却力)이다. 그를 잘 아는 사람이 말했다. “골프는 망각력이 기억력 못지않게 중요하다. 김효주는 좋지 않은 기억을 쉽게 잊고 다음 상황에 곧바로 돌입한다. 이 덕분에 위기에서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유쾌하다. 19세 소녀가 자신의 적, 자신의 실수, 자신의 고난, 자신의 과거, 자신의 비행을 오랫동안 생각하지 않고 기억에서 말끔히 지우고 현재에 집중할 수 있다니.

망각력이 뭔가. 일찍이 철학자 니체는 설명했다. “기억은 약자의 원한이다. 강자는 그런 기억에 대한 적극적인 저지 능력을 갖고 있다.” 망각력은 타성에 의한 건망증이 아니라 자신을 통제하기 위해 스스로 잊어버리는 능력인 것이다. 스무살도 안 된 아이가 그런 내공을 보이다니 놀랍고 대견하다.

둘째, 복원력(resilience)이다. 김효주는 캐리 웹에게 16번 홀에서 역전당하고 파4인 17번 홀에서 두 번째 샷을 실수했다. 중압감이 컸으리라. 뒤땅을 쳐 공은 그린에 못 미쳤다. 경쟁자 캐리 웹은 파온한 상태. 어프로치 샷마저 잘못 되면 승부는 완전히 기우는 긴장된 순간이다. 김효주는 의연하게 세 번째 샷을 홀에 붙여 파로 막았다. 대역전극은 여기서 시작됐다. 복원력은 불행과 상처를 딛고 신속히 정상으로 돌아오는 힘이다. 김효주는 운이 좋아 에비앙 트로피를 거저 들어올린 것이 아니다.

백영철 논설위원
정치에서 망각력, 복원력은 더 중요하다. 골프보다 더 필요하다. 하지만 연륜이 깊은 어른들도 정치판에선 전혀 그렇지 못하다.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원내대표가 그렇다. 특별법 합의 번복, 이상돈 교수 영입 실패, 탈당 카드 등으로 야당을 자욱한 흙먼지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런 혼선보다 심각한 것이 있다. 망각력과 복원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점이다. 박 대표는 당에서 알아주는 강성파였다. 지난해 말 법사위 파동에 이어 올 5월 원내대표가 된 뒤에도 세월호특별법을 두고 강경 목소리를 주도했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지려야 질 수가 없는 6·4 지방선거와 7·30 재보선에서 당이 완패했다. 그는 비대위원장 자리에 오른 뒤 잠시 망각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였다. 민생을 얘기하고 세월호특별법 협상에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곧 강성파의 추억으로 빠져들었다. 그 길이 실패의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 것이다.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에게 새로운 미래는 열리지 않는다. 망각능력은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고 앞날을 창조적으로 만들어 내는 힘이다. 늪은 빠져나오려고 허우적거리면 더 깊숙이 빨려든다. 조급해하기보다 때로는 긴 호흡으로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골프에 견준다면 위기에 닥치면 더 나빠지지 않게 마무리하고 다음 홀을 준비하는 긍정적 포기가 중요하다. 박 대표는 이마저 발휘하지 못했다.

김효주의 승전보 다음날 박근혜 대통령은 장관들 앞에서 세월호특별법과 관련, 여야가 협상 중인 사안에 대해 ‘마지막 결단’이라는 말로 선을 쫙 그었다. 그러곤 여당 대표를 청와대로 불러 ‘통보’했다. 20여년 전 대통령이 여당 총재이던 시절을 연상시킨다. 말의 날카로움은 누구라도 찌를 기세다. 이래저래 힘든 국민은 모성 리더십을 기대하지만 현실은 딴판이다. 말에 날이 서 있어선 모성 리더십 발휘는 불가능하다. 김무성 대표는 회동 뒤 “우리가 청와대 지시 받을 입장이 아니다”고 했다. 수평적 당청관계를 말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퍼포먼스는 정반대의 방향을 시사하고 있다. 이 장면은 앞으로 정치판을 더욱 꼬이게 할지도 모른다. 청와대와 여당 역시 망각력과 복원력을 배우고 키워야 한다. 좋지 않은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은 실패의 길이다.

우문이지만 그래도 묻는다. 골퍼처럼 즐거움을 주고 김효주처럼 감동을 주는 정치는 불가능한가.

백영철 논설위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아일릿 이로하 '매력적인 미소'
  • 아일릿 민주 '귀여운 토끼상'
  • 임수향 '시크한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