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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 김중업 곡선의 디자인 언어로 ‘걸작’ 낳아

입력 : 2014-09-18 21:16:23 수정 : 2014-09-18 21: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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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101〉 영웅
# 야구의 전설, 김응용 감독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야구라는 경기를 처음 봤다.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중계하는 국가대항전이었는지 우리나라 국가대표가 나오는 야구경기를 보게 된 것이다. 당시 나는 운동경기라면 김일이 나와서 박치기로 통쾌하게 상대를 제압하는 레슬링이나 센터포드 이회택이 바람같이 달리는 축구는 열심히 봤지만 야구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경기규칙이나 재미있는 포인트를 알 리가 없었고, 그냥 던지고 치고 달리는 것만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었다. 그런데 중간에 갑자기 덩치가 산만 한 선수가 배트를 휘두르며 타석에 들어서는 것을 보며, 반쯤 나가있던 정신이 황급히 돌아왔다.

야구선수라기보다는 씨름선수가 더 어울릴 것 같은 충격적인 외모였다. 그는 마치 우리 집 텔레비전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덩치가 좋았고, 그리고 얼굴도 도저히 선수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좀 나이 들어 보였다. 그 선수는 경기를 하는 방식도 아주 특이했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배트를 휘둘러 공을 맞히면 죽어라 뛰어나가는데, 그는 배트로 공을 치고도 열심히 뛰는 것이 아니라 어슬렁어슬렁 자기만의 속도로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타격은 홈런이 아니면 아웃이었다. 아니, 저 사람은 뭐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타순이 한 바퀴 돌아 다음 번 그 선수가 나오기를 또 기다리게 되었다. 40년 전 그날 그가 홈런을 쳤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엄숙한 얼굴로 성큼성큼 베이스를 향해 뛰는 것도 걷는 것도 아닌 상태로 이동하는 영상은 아직도 뚜렷하고 영롱하게 남아있다.

그때 듣기로는, 내가 보았던 그 경기는 그의 선수 은퇴를 앞둔 경기였고, 이름은 김응용이었다. ‘4번타자 김응용’. 나는 이후로 수많은 강타자, 홈런타자, 4번타자들을 봤지만 아직도 4번타자 하면 김응용이 생각난다. 이를테면 각인효과인 것이다.

이후 나는 야구라는 경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당시 인기 있던 고교야구, 실업야구 등을 열심히 쫓아다니며 구경하게 되었다. 김응용은 선수 은퇴 이후 곧바로 한일은행 감독으로 활약했고, 1977년에는 대륙간컵대회라는 국제 경기대회에 국가대표 감독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물론 그 당시의 상황으로 경기를 중계를 통해서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국제경기대회에서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우승을 했다는, 그것도 미국팀과 맞붙은 결승전에서 우승을 했다는 믿기지 않는 소식을 뉴스를 통해서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야구 인생은 1980년대 초에 시작된 프로야구에서 감독으로 취임하여 전설적인 기록을 남기며 죽 이어졌다.

그가 감독을 맡았던 해태타이거즈라는 팀은 금전적 지원도 시원찮고 선수들의 개성이 너무 강해, 그 전에는 가능성은 있으나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없는 팀이었다. 그런 팀이 그가 감독을 맡자마자 마치 만화 속의 이야기처럼 믿을 수 없는 강팀이 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강인한 정신력으로 이겨내는 팀이 된 해태는 그가 있는 동안 무려 9번의 우승을 하게 된다. 나는 줄곧 그가 속한 팀을 응원했다. 한일은행-해태 타이거즈-삼성 라이온즈로 이어지며 그가 옮기는 팀이 내가 응원하는 팀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한국시리즈를 10번 우승하는 금자탑을 세운 후 2004년에 은퇴를 하며, 나 역시 야구와는 멀어졌다. 

김중업의 초기작인 안양 유유산업 공장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개관한 ‘김중업박물관’ 문화누리관.
# 돌아온 영웅


삼성라이온즈 사장직을 수행하다 물러나 몇 년간 야인으로 생활하던 김응용 전 감독이, 2013년 70이 넘은 나이에 다시 현장으로 복귀했다. 참으로 의외의 일이었다. 그것도 몇 년째 성적이 아주 좋지 않은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부임한 것이다. 한국 야구사에 큰 족적을 남긴 사람이, 다시 그것도 최하위 팀의 감독으로 가다니…. 무척 걱정을 하며 나도 다시 거의 십년 동안 보지 않았던 프로야구 경기를 다시 보게 되었다. 이후 한화 이글스는 어이없이 매 경기에서 무기력하게 패하고, 김응용 감독은 쏟아지는 엄청난 비난을 들어야 했다. 복귀 2년째인 올해, 근성 있는 그의 야구가 다시 살아나고 있어 나는 겨우 안도하고 있는 중이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꼽아본다면, 다양한 공기와, 물과, 다양한 영양분과, 지식과, 희망 등등이 있다. 그 외에도 사람들에게는 영웅이 필요하다. 영웅이란 대단한 용기와 지혜로 역경을 이겨내며 불가능할 듯한 일을 해내는 사람을 일컫는다. 우리에게 영웅은 이순신 장군과 같은 위인도 있지만,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당대의 어떤 지표가 되어주는 사람도 필요하다. 그래서 영웅이 우리 앞에 나타나기도 하지만, 우리가 마음속으로 영웅을 키우기도 한다.

사람들은 영웅들, 특히 스포츠 영웅을 보며 자기와 동일시한다. 그들이 경기라는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내는 고난과 극복 등의 과정을 보며 대리만족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나 책에서 보는 영웅보다는 보다 직접적으로 접할 수 있는 스포츠 영웅에 집착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영웅은 야구감독 김응용이었다. 물론 그를 아는 것은 그가 하는 일인 야구에 국한되어 있기는 하지만, 어려운 여건에서 불굴의 투지로 반드시 이겨내는 그의 모습은 나에게는 이를테면 슈퍼에고의 역할을 해주었다.

영웅에 관한 이야기는 무척 많이 있다. 신화, 소설, 서사시, 연극, 영화 등 사람들은 모든 장르를 통해 영웅에 대해 노래하고 극을 꾸민다. 그중 좀 특이한 영화 한 편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무숙자’(無宿者)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던 영화인데, 원제는 ‘My Name Is Nobody’(1973)이다.

이 영화의 기본 골격과 주연 ‘노바디’ 역을 맡았던 테런스 힐(Terence Hill)이라는 영화배우는 우리나라에서 굉장히 큰 인기를 끌었던 ‘튜니티’(Trinity)라는 시리즈에 출연했는데, 대부분 제작과 연출과 음악은 모두 이탈리아와 독일과 프랑스가 합작으로 만든 ‘마카로니 웨스턴’(macaroni western)이라는 비정통 서부영화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76년에 개봉된 ‘무숙자’는 영웅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마카로니 웨스턴의 태두인 세르지오 레오네(Sergio Leone)의 조감독을 하며 많은 영화를 같이 만들었던 토니노 발레리(Tonino Valerii)가 그의 스승이자 영웅인 세르지오 레오네에게 바치는 헌사와 같은 영화이다. 영화의 배경은 거친 총잡이들이 활보하고 금광으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미국 개척시대의 서부이다. 내용은 전설적인 총잡이 잭 보르가드(Jack Beauregard)와 그를 영웅으로 생각하는 총잡이에 관한 이야기이다. 은퇴하려는 잭은 마지막 150대 1의 전설적인 결투를 끝으로 신화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사실 이 신화는 그의 열렬한 팬인 총잡이 노바디의 계획에 의한 드라마였다. 아마도 영웅에 대해 품고 있는 우리의 로망을 투영한 영화였기에, 무척 마음에 와닿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던 것 같다.

한국현대건축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김중업의 주한프랑스대사관 업무동(왼쪽)과 대사관저.
건축문화 9403 제공
# 한국 현대건축의 영웅, 김중업


우리나라의 전통건축은 발전된 건축 기술에 비해 장인이나 명인으로 기록에 남은 사람이 거의 없다. 정말 희한하다. 한국 건축의 명작들을 하나하나 보면, 그 집의 주인에 관한 기록은 엄청나게 많이 있지만 그 집을 지었던 건축가라든지 시공자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던 것이 건축가라는 존재가 사회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건축가는 종로의 화신백화점을 설계했던 박길룡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스타 건축가는 김중업(1922∼1988)이라는 데 아마도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건축가 김중업은 한국현대건축의 1세대 건축가이다. 내가 건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도 김중업, 김수근 두 건축가의 이름은 어디선가 들어서 알고 있었을 정도이다. 그는 나와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이자, 건축계에서는 영웅이라고 부를 만한 선배 건축가라고 생각한다. 그는 여러 매체를 통해 건축가라는 직업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줬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좋은 건물을 많이 설계하여 남겨놓았다. 그는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주한 프랑스대사관 외에도 우리나라의 개발시대를 상징하는 삼일빌딩, 올림픽 상징조형물인 평화의 문, 건국대·부산대·서강대 본관, UN 묘지 정문, 진주문화회관을 비롯한 200여 작품을 남겼다. 그의 건축은 주로 곡선과 원형 등의 기하학적 형태에서 유출해낸 디자인 언어로 낭만적이고 시적인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그가 사용한 곡선은 전통건축의 부드러운 미감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매우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대사관이라는 특성상 일반에게 잘 공개되지는 않지만, 한국현대건축사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자주 거론되는 건물 중 하나가 김중업이 설계한 주한 프랑스대사관이다.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자리 잡고 있는 대사관 일대는 예전부터 외국 대사관저들이 모여 있었던 곳인데, 한일합병에 대한 의분을 참지 못해 자결한 민영환이 살던 집터이기도 하다. 현대건축의 경향과 한국적 전통을 결합시킨 설계 의도는 하늘과 만나는 지붕의 조형에서 강조되는데, 대사관저와 업무동 모두 건물과 지붕 사이를 띄우고 기둥을 노출시켜 날렵하고 미려한 곡선을 가진다. 건립 당시 프랑스의 건축가 7인과 함께 지명설계에 응모하여 당선된 김중업은 이 건물을 “내 작품 세계에 하나의 길잡이가 되었다”고 표현할 정도로 애착을 가졌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이루어진 증축으로 프랑스 대사관의 원형은 상당 부분 손상되었는데, 대사관저는 증축과 내부의 개수에도 제모습을 거의 유지하고 있는 반면, 업무동이 구조 불안 등을 이유로 지붕 부분이 크게 개수되면서 이미지가 전혀 달라진 것은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김중업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공로훈장과 슈발리에 칭호를 받기도 했으나, 문화의 암흑기였던 제3공화국 시대를 거치며, 부실한 성남시 도시계획 등의 정부시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다 자의반 타의반 약 8년 동안 외국에 나가 살아야 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건축가는 역사에 대한 목격자이며 지성인으로서 정부가 잘못하는 일은 용감히 비판하고 시정토록 이끌어감으로써 역사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이상주의가 부른 화근이었다.”(안병의, ‘김중업의 작품과 건축관에 대하여’)

나는 건축가 김중업이 세상을 떠나기 전해인 1987년 가을, 어느 대학에서 준비한 특강에 가서 그를 처음 보고 육성을 들을 수 있었다. 열심히 달려간 무척 큰 강연장에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고, 몸이 불편해서 앉아서 강연을 하겠다고 이야기하는 그의 목소리는 무척 우렁찼다.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을 하고, 30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계예술가회의에 한국대표로 뽑혀서 우리나라 예술계의 원로들과 참석한 이야기, 그리고 이후 르코르뷔지에의 문하로 들어가 수업한 이야기, 귀국해서 대학교수를 하고 작품활동을 했던 이야기 등이 파란 많은 한국 현대사와 겹쳐지며 유장하게 펼쳐졌다.

지금 김중업의 건축은 안타깝게도 ‘제주대학 본관’처럼 철거되거나 ‘서산부인과’처럼 원형이 손상된 경우가 많아 아쉽기만 하다. 다만 최근에 그의 초기작인 안양 유유산업 공장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개관한 ‘김중업박물관’에서 그의 건축을 기억할 수 있게 되어 무척 다행이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집, 도시를 만들고 사람을 이어주다’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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