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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성공 뒤엔 해군 특수첩보대 있었다

입력 : 2014-09-15 19:37:30 수정 : 2014-09-15 21: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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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제64주년 기념식서 밝혀 세계 전쟁사에서 최고의 작전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는 한국 해군 특수첩보대의 큰 역할이 있었다.

국방부는 15일 “인천 월미도에선 제64주년 인천상륙작전 전승기념식이 개최되며,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는 적지에서 첩보 활동을 한 한국군 해군 특수첩보대의 역할이 컸다”고 밝혔다.

64년전 그날처럼… 인천서 올라간 태극기 인천상륙작전 64주년을 맞아 해병대 장병들이 15일 오전 인천 월미도 앞바다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재연해보이고 있다.
인천=연합뉴스
6·25전쟁 초기, 북한군이 남한 전역을 점령한 상황에서 적진 한가운데를 급습하는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미 극동군사령부는 작전 이전에 북한군이 점령한 인천과 서울 등지에 투입된 적 병력과 장비, 진지 등을 소상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에 당시 미 극동군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에게 첩보 활동을 위한 부대 창설을 요청했다. 함명수 소령, 임병래 중위, 홍시욱 하사 등 17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해군 특수첩보대가 비밀리에 창설된 배경이다.

해군 특수첩보대는 8월18일 오전 1시 어선을 타고 부산항을 떠나 6일째인 8월24일 서해 영흥도에 도착했다. 작전 보안을 위해 첩보작전의 거점인 영흥도에 도착해서야 함 소령은 대원들에게 작전의 목적과 구체적인 임무를 하달했다.

특수첩보대 대원들은 3개조로 나뉘어 인천과 서울, 수원을 왕래하면서 첩보 활동을 펼쳤다.

인천상륙작전 개시 하루 전, 영흥도를 거점으로 첩보전을 펼치던 특수첩보대에 철수명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철수 준비를 서두르던 새벽 2시, 첩보 활동을 뒤늦게 감지한 북한군 1개 대대가 영흥도를 기습했다. 당시 11명의 대원들은 철수하고, 영흥도에는 임 중위와 홍 하사 등 6명의 대원만 남아 있었다.

정규작전을 수행할 무기를 갖추지 못한 첩보대원들은 적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임 중위와 홍 하사가 적의 공격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는 동안, 나머지 대원들은 해안에 정박해 둔 마지막 보트를 타고 탈출했다. 상륙작전을 불과 24시간 앞두고 적의 포로가 될 경우 작전이 탄로 날 것을 우려해 임 중위와 홍 하사는 권총으로 자결을 택했다. 하지만 이들의 첩보활동은 9월15일 미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함재기가 인천 앞바다 월미도를 폭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이끌었다. 한·미 정부는 임 중위와 홍 하사의 공로를 기려 1953년 7월 미 정부가 은성훈장을, 1954년 1월 우리 정부가 을지무공훈장을 각각 수여했다.

한편 이날 인천 월미도에서는 제64주년 인천상륙작전 전승기념식이 황기철 해군참모총장, 유정복 인천광역시장 등 군 주요 지휘관과 장병, 인천시 기관장, 참전용사, 시민, 학생 등 22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거행됐다.

김선영 기자 007@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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