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田씨는 원래 중국 성씨… 순임금의 후예로 제나라 세운 왕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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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9-02 21:05:24 수정 : 2014-09-02 21: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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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78>전(全, 田)씨와 담양전씨(潭陽田氏) 전(田)씨는 원래 중국의 성씨이다. 중국 전씨는 순(舜)임금의 후예로 제나라를 세운 왕족으로 알려져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주나라의 봉건국가 중에 진(陳)나라가 있었는데, 완(完)이라는 공자가 왕실의 정쟁에 휘말려 제나라로 도주한 뒤 신분을 숨기고 살았다고 한다. 그의 원래 성씨는 규씨였으나, 제나라에 와서는 모국인 진나라의 진을 성씨로 삼았다고 한다. 후에 제나라 왕으로부터 관직을 얻고 별호로 전을 쓰다가 진이라는 성을 전으로 바꾸었다고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전씨에 대한 기록은 박혁거세 때로 올라간다. 즉, 박혁거세의 아들 중 둘째인 적(赤)의 부인이 전씨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당시에 성(性)을 지니지 않았다는 것이 통설이기 때문에 이를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긴 힘들다. 

담양전씨 시조대제 담양전씨 문중에서는 시조 전득시를 비롯해 담양전씨 3은파의 파조인 전록생, 전귀생, 전조생 등을 모시는 대제를 치르고 있다.
이와는 또 다른 전씨 도래에 대한 설화가 있다. 중국의 진나라 말기 진승과 오광이 반란을 일으키자, 제나라 왕실출신인 전횡(田橫)이라는 사람이 형인 전담(田膽), 전영(田榮)과 함께 진에 반기를 들고 제나라를 일으켰으나, 한고조 유방이 천하를 평정하자 산동성 칭다오(靑道)의 전횡도에 숨어살았다. 이에 유방이 불러내자 수도인 낙양으로 가는 도중 자결하고 그를 따르던 500명의 빈객들도 함께 자결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칭다오에는 전횡오백사(田橫五百士)의 묘지가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와는 다른 전설이 내려온다. 즉, 전횡이 은거했던 곳이 산동성 칭다오가 아니라, 바로 군산의 고동과 어청도라는 것이다. 지금도 군산시에 가면, 전횡을 기리는 치동서원이 있다.

이러한 전설 외에 우리 역사에서 전씨가 등장한 것은 영광전씨의 시조이자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알려진 전종회(田宗會) 때부터이다. 그 다음이 태산전씨의 시조인 전충문(고려 문종)이고, 그 다음이 전씨의 대종을 이루는 담양전씨의 시조인 전득시(田得時)이다.

그 외 현재 전하는 대부분의 전씨들은 담양전씨에서 갈라져 나간 본관들로 여겨지고 있다. 다만, 남양전씨의 시조는 중국의 한림학사로 고려로 귀화하여 남양군에 봉해진 전풍(田豊)이라고 알려지나 계대가 확실치 않고, 고려말에 직제학을 역임한 전주(田柱)를 시조로 삼고 있다. 전주는 본래 이름이 왕강(王康)으로 고려 왕족이었던 순흥군 왕승(順興君 王昇)의 아들이었지만, 조선의 왕씨 말살 책에 따라 공주목(公州牧)의 관노가 되어 일신역(馹新驛)으로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그의 손자 전흥(田興)이 이방원의 집 하인으로 들어가 1, 2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전흥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남양전씨가 출발하였다(다만, 출생연도 등으로 왕강이 전주가 아니라는 주장 또한 존재한다).

그 외 일본의 성씨로 알려진 다나카(田中)도 한국의 전씨에서 파생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 1970년대 일본 총리를 지낸 다나카(田中)는 자신이 “담양전씨의 후예로 담양전씨 시조 전득시의 12대손이 일본으로 건너가 살게 되었다”고 말했다. 실제 한국의 전씨들도 일제강점기 창씨개명 때 전중(田中)으로 성씨를 쓰기도 했다. 

공양왕릉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공신들은 고려 왕족인 왕씨들에게 “강화도와 거제도 등으로 이주하면 평민으로 살게 해준다”며 배를 태워보내다 침몰시키는 방식으로 왕씨들을 죽였다. 그리고 살아남은 왕씨들은 관노비 등으로 보내거나 처형했다. 그 후 많은 왕씨들이 도망쳐 전(全)씨, 전(田)씨, 옥(玉)씨 등으로 왕(王) 자를 숨기고 살았다.
■담양전씨(潭陽田氏)는

담양전씨는 고려중엽(의종)에 참지정사 좌복야를 역임하고 담양군에 봉해진 전득시(田得時)를 시조로 한다. 대대로 담양에서 살았던 향리집안의 자제로 알려지며, 그의 선조에 대해선 밝혀진 것이 없다. 그는 고려 의종 때 현량천의 문과에 발탁되었으며, 중서문하성 참지정사를 거쳐 상서군성 좌복야를 지냈다. 시호는 충원(忠元)이며, 담양군에 봉해져 그 후손들이 담양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담양전씨는 시조 전득시로부터 6세까지는 독자로 이어지다 6세인 전희경(田希慶)의 아들 대에서 야은 전록생(田綠生), 뢰은 전귀생(田貴生), 경은 전조생(田組生) 삼형제가 배출되어 야은공파, 뢰은공파, 경은공파로 나뉘어졌다.

이러한 담양전씨는 전씨의 대종을 이루는데, 많은 전씨 본관들이 담양전씨로부터 분적되어 나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담양전씨에서 분관된 성씨는 연안전씨(延安田氏), 하음전씨(河陰田氏), 평택전씨(平澤田氏) 등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연안전씨는 전득시의 후손인 전가식(田可植)이 조선 정종 때 예조판서를 지내고 연안군에 봉해짐으로써 분관했다고 전해지며, 하음전씨는 전균(田畇)이 단종 때 정난공신으로 하음군에 봉해져 분적했다고 한다. 또 평택전씨(平澤田氏)는 평택에서 출생한 시조 전광언(田光彦)이 단종 때 호조좌랑을 지내는 중 세조의 왕위찬탈을 반대하다 평안도도사로 밀려난 뒤 벼슬을 버리고 평양에 정착한 후 그의 후손들이 그의 고향인 평택을 본관으로 삼아 담양전씨에서 분적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고양전씨, 예산전씨, 남원전씨, 우봉전씨, 개성전씨 등이 담양전씨로부터 분적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담양전씨의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모두 46명이다. 문과 12명, 무과 8명, 사마시 26명 등이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담양전씨는 3만9912가구 총 12만8007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담양전씨 시조 전득시 묘비 담양전씨의 시조인 전득시는 담양에서 대대로 살아오던 향리집안에서 태어났다.
■담양전씨의 연혁과 인물

담양전씨는 시조인 전득시 이후 6세까지 정승급에 4명이나 오르고, 2명이 봉군을 받을 정도로 인물들을 배출했지만, 6세 전희경까지 독자로 이어질 정도로 손이 귀했다. 2세 전자존(田子存)은 추밀원사를, 3세 전승윤(田勝允)은 문하시중을, 4세 전공일(田公逸)은 평장사를, 5세 전영(田永)은 첨의중찬을, 6세 전희경은 첨의사인을 역임하였다. 이후 전희경의 아들 3형제가 크게 현달하여 가문이 크게 번성하였다.

전희경의 큰아들인 야은 전록생은 예문관 대제학에 사헌부 대사헌에 올랐으며, 둘째 아들 뢰은 전귀생은 삼사좌윤 밀직제학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셋째 아들 전조생은 찬성첨의부사를 지냈다. 이들을 가리켜 ‘전씨 삼은’이라고 일컫는다. 첫째 전록생은 충혜왕 때 과거에 급제한 후 문무겸전으로 내외요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명신으로 이름을 날렸다. 우왕 1년에 이인임을 처형할 것을 주청하다가 박상충과 함께 모함을 받아 죽음을 당했다. 이에 이색, 이재현, 정몽주 등이 깊은 애도를 표했다. 삼사좌윤 밀직제학을 역임한 둘째 전귀생은 고려가 망한 후에는 두문동에 들어가 은거하여 두문 72현이 되었다. 셋째 전조생은 학문과 덕망이 깊어 충혜왕으로부터 두 왕자를 부탁받기도 했으며, 충정왕을 몰아내고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자 충정왕을 호종하여 강화에까지 가기도 했다. 정몽주의 시구에 자주 언급된 인물이기도 하다.

담양전씨의 삼은파 중에서 첫째 야은파에서는 조선후기 대학자로 알려진 간재 전우(田遇)가 유명하다. 그는 율곡 이이와 우암 송시열의 학통을 이어받은 학자로서 강원도 도사, 사헌부 장령, 순흥부자 등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한일병합이 이뤄지자 제자들과 함께 왕등도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그 후 전북 계화도로 옮긴 후 민족정신을 강조하였다. 그의 제자 가운데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를 비롯하여 김준영, 오진영, 최병심, 윤제술, 소선규 등이 유명하다.

뢰은 전귀생의 후손에서는 손자인 전무(田畝)는 참찬을 역임했으며, 증손자 전가식은 예조판서를 역임한 후 수차례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오고 연안군에 봉해졌으며, 연안전씨의 시조가 되었다. 전양민(田養民)은 세종의 경호책임을 맡은 후 공을 세워 한성판윤이 되었으며, 전좌명(田左命)은 효자로 유명하다. 참의공 전임(田稔)은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 참가하였으며, 남평군수 한순과 합세하여 양주산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경은 전조생의 후손이 3파 중에서 가장 많은데, 회정공 전자수(田子壽)는 고려 말 시국이 혼란스럽자 강원도 안렴사로 순시하다 평해에 이르자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전균(田畇)은 환관으로 궁궐에 들어갔으나, 수양대군이 황보인, 김종서 등을 제거할 때 공을 세워 정난공신 2등에 책록되고 하음군에 책봉되어, 그의 후손들이 하음전씨로 분적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전윤(田潤)은 임진왜란 당시 왕을 호종하여 호종일등공신에 책록되었다. 또 전봉(田鳳)은 황해도절도사로 권율장군을 도와 공을 세웠으며, 광해군 때 무재로 추천되었으나 사양하고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전운상(田雲祥)은 숙종 때 무과에 급제한 후 병사, 수사, 목사, 삼도통제사를 역임하였는데, 거북선에 필적하는 철갑선인 해골선을 만들어 유명하다. 또 경상병사로 재직할 때는 독윤전차를 만들어 육전에 대비하였다. 전운상의 동생 전일상(田日祥)은 무과에 급제하고 창원부사를 역임하였다. 이인좌의 난 때 나주지방 토적인 나숭대를 체포하였다. 또 다른 전운상의 동생인 전천상(田天祥)은 음직으로 선전관에 올랐다. 희천군수, 춘천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전운상의 아들인 전광훈(田光勳)도 영조 때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과 내금장, 창원부사를 역임하였다. 

독립운동가 전명운 전명운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과 함께 을사조약을 체결하는 데 일조한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살해했다. 하지만, 장인환과 공모관계가 밝혀지지 않아 무죄판결을 받았다.
■담양전씨 근 현대 인물


담양전씨 근현대 인물 중에선 독립운동가로 전명운(田明雲)이 유명하다. 그는 1905년 하와이로 이민 간 후 샌프란시스코에서 막노동일을 했다. 하지만, 남달리 애국심이 강해 안창호 등이 조직한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친일파 미국인이면서 대한제국 외교고문을 맡고 있던 스티븐스를 죽이려고 격투하던 중, 장인환이 권총으로 스티븐스를 저격하여 살해하였다.

그 외 담양전씨 현대인물로는 국회의원으로 전만중, 전석봉, 전영석, 전용학, 전병헌, 전여옥 등이 있으며, 정·관계 인물로는 전봉덕(헌병사령관·대한변호사협회 회장), 전병곤(전남교육감), 전용성, 전병식, 전수안(이상 판사), 전용태(검사) 등이 있으며, 학계에서는 전풍진(광운공대 명예교수), 전광우(미국테네시주립대 부교수), 전혜린(성균관대 교수), 전영환(한양대 교수), 전구제(동아대학장) 등이 있다.

또 재계에서는 전길수(삼부주택 대표), 전유석(영남기업 대표), 전준수(고려상사 회장), 전근배(제일사료 대표), 전효수(대동상호신용금고 대표), 전무호(한일운수 대표) 등이 있으며, 성악가 전승리, 탤런트 전운씨도 담양전씨이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운영위원장 ksh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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