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후난성 즈장의 중국인민항전승리수항기념관을 찾은 관람객들이 일본의 항복 현장 사진 등을 살펴보고 있다. |
이어 도착한 중국전구수항전례회장. 입구 벽면에는 평화를 영원히 기린다는 뜻의 화평영존(和平永尊)이란 글자가 큼지막하다. 내부에는 일본이 공식 항복문서를 조인하기에 앞서 1945년 8월21일 역사적인 항복 의식이 치러진 현장이 옛날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중국의 국부 쑨원(孫文) 사진 앞 수항대표단 쪽으로 놓인 책상 위에 일본 이마이 다케오(今井武夫) 중국파견군 부총참모장 등 3명의 일본 측 투항대표단 이름이 선명하다. 이날 중국 측이 취재진에게 상영한 동영상에는 일본 대표단이 이곳에서 중국 대표단에 군 병력 배치도를 넘기고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장면 등이 나온다. 이날 취재일정에 동행한 한 일본 신문 기자는 “일본군이 이렇게 항복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중국이 피를 흘려 쟁취한 뜻을 담은 혈(血) 자 모양의 ‘수항기념비’. |
지난 2월 중국 당국은 3일 중국인민항일전쟁승리 기념일을 국가기념일로 처음 지정했다. 이번 기념일행사는 중국 ‘항일(抗日)공정’의 정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성싶다.
중국 공산당은 대일 역사투쟁의 주요 거점으로 즈장을 부각시킨 이유가 궁금해졌다. 원래 국민당이 통치하던 1945년 당시 중국이 일본으로부터 공식 항복 문서를 접수한 것은 그해 9월 9일 난징에서였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항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승리에서 중국의 역할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 분수령은 1945년 4월 9일∼6월2일 전략 요충지 즈장을 점령하기 위한 샹시(湘西)대전투였다는 주장이다. 1945년 ‘최후의 격전지’로 불리는 사통팔달의 전략 요충지 즈장에서 중국군이 미군에 비행장을 내주면서 함께 항전한 샹시대전투 승리가 일본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는 것.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당시 전투에서 일본군 2만8174명, 중국군 2만220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정도로 양측은 총력전을 펼쳤다. 이후 8월6일 미군이 일본 본토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면서 일제가 8월15일 무조건 항복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다.
국가당안국(기록보관소) 마전두(馬振犢) 중국제2역사당안관 부관장은 “국민당이 일본의 항복문서를 접수했지만 공산당과 국민당이 함께 노력한 결과”라며 “동남아 등 전 세계 화교들도 중화민족의 항일전쟁에서 큰 공헌을 했다”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마 부관장은 특히 “항일전쟁에서 일본군의 항복 접수까지 역사 과정상에서 즈장의 의미를 고려해야 한다”면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중국의 역할에 대해서도 서구 세계는 편견을 갖고 있다”고 목청을 높였다. 우젠훙(吳建宏) 중국인민항일전쟁승리수항기념관장은 “일본군이 투항하는 원시 자료를 추가 공개한 것은 옛날 군국주의를 꿈꾸는 우익분자에 대한 일종의 경고”라고 강조했다.
즈장=글·사진 신동주 특파원 range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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