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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문학노트] 여름과 가을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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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8-29 20:51:57 수정 : 2014-08-29 23: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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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 시인 류기봉씨, 김춘수 10주기 추모 포도밭예술제 열어
짧아서 아름다운 계절의 건널목서 마음의 창 열어보자
우리는 지금 ‘바비예 레토’(Babye Ieto)를 건너가는 중이다.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짧은 건널목, 이 기간의 청명하고 아름다운 날씨를 일컬어 러시아에서는 ‘바비예 레토’라고 부른다. 긴 겨울에 이어 천둥 번개 치는 짧은 여름을 지나 다시 혹독한 계절로 접어들기 이전 스타카토 같은 기간인 셈이다. 가을과는 또 다른 환하고 맑고 푸른 틈새, 그 기간이 ‘아낙들의 여름’으로 불리는 바비예 레토다. 이 기간은 불과 열흘 남짓밖에 펼쳐지지 않는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짧아서 더 아름다운 숙명이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올봄부터 여름이 끝나가는 지금까지 우리는 내내 참혹했다. 꽃 같은 목숨들이 바다에 가라앉고 장정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맞아서 죽었다. 죽음이 난무하여 숨조차 제대로 쉬기 어려운 어둔 시기를 건너왔다. 꽃 피고 바람 불어도, 새가 울고 청명해도 마음 속 세상은 어두웠다. 우리 가슴에는 알게 모르게 검은 대못이 하나씩 박혀 있을지 모른다. 죽음과 ‘미필적’ 고의 죽임 사이에서 우리는 여전히 증오와 분노로 몸살을 앓고 있다. 마음이 아프니 몸도 아프다. 우리의 ‘바비예 레토’는 어디서 찾을까.

오늘(30일) 경기 남양주군 장현리 ‘류기봉 포도밭’에 가면 하루 정도는 맑은 마음의 하늘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17년째 포도밭에서 시낭송회를 열어 유명해진 곳이다. 꽃의 시인 김춘수(1922∼2004)의 제안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포도밭 주인 류기봉 시인이 유기농으로 지어 수확철이 될 즈음에 시인들을 불러 모은 뒤 시와 음악과 포도를 나누는 연례행사로 굳어졌다. 올해는 김춘수 시인 타계 10주기를 맞아 그의 유작과 필사본 시, 강의노트까지 포도밭에서 공개된다.

김춘수 시인이 생전에 제자인 류기봉 시인에게 프랑스 어느 시골 포도밭에 갔더니 음악과 그림과 시가 어우러지는 축제가 펼쳐지는 걸 보았다면서 이곳에서도 포도와 시의 만남을 진행하면 어떠한지 제안했다고 한다. 이를 받아들여 진행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광목에 시인들의 시를 적어 포도나무에 내건다. 시를 음미하면서 포도나무 터널을 통과하면 비탈진 언덕 위에 전나무 숲이 있다. 이 숲에서 본격적인 시낭송회가 펼쳐진다.

류기봉 시인의 남다른 노력도 가상하다. 농약을 치지 않고 천연 퇴비를 만들어 벌과 나비와 새들과 더불어 같이 포도를 누린다. 여느 농가의 30% 정도밖에 소득을 챙길 수 없다. 때로는 약을 칠까 싶은 강한 유혹에 시달리다가도 막상 현장에 가면 생명들의 하소연에 마음이 허물어졌다고 한다. 이런 시가 나오는 배경이다.

“겨울 포도나무를 가위로 자르면/ 겨울잠을 자는 새가 떨어진다./ 가지 끝에 달빛을 올린/ 새의 집, 그 새의/ 휴식처를 땅바닥에 팽개친다.// 그런 날은 나도 하늘도 몹시 아프고 쑤신다./ 하늘을 보니 일그러진 하늘/ 쭈글쭈글 오므라든 가지여,// 또 눈이다./ 눈이 온다. 땅에 흰 눈이 덮인다./ 새의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새와/ 달빛과/ 별빛들/ 흔적들이 사라진 빈 들판에 서서/ 헛가위질만 계속했다.”(‘가지치기’)

헛가위질만 하는 시인의 마음이 이해되는가. 인간도 살아야 하니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게 ‘상식’인 세상이다. 문제는 얼마나 더 벌어야 ‘사는’ 것인지 그 탐욕의 끝을 모르기 때문에 상식이 허물어지는 것이다. ‘류기봉 포도’는 다른 포도들에 비해 잘고 상처도 많은 못난 포도다. 유혹이 생길 때마다 시인은 포도를 같이 나눌 벌과 나비와 새들을 생각했다고 한다. 같은 인간들끼리의 나눔과 애틋한 생명은 말해 무엇 할까.

포도밭 시의 터널을 지나 전나무 숲에서 어두운 마음의 창을 열어 보는 건 어떨까. 각자 앉거나 선 자리에서 잠시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을 한 번 쳐다보아도 좋다. 죽음과 죽임은 미봉해도 상처는 깊고 오래 갈 것이다. 다가올 계절을 견디려면 우리에게도 ‘바비예 레토’가 필요하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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