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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내 인생의 책은 서점의 먼지더미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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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8-29 20:44:37 수정 : 2014-08-29 21: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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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무명작가 보석 같은 책도 소개되길
베스트셀러 대부분 ‘미디어셀러’ 차지
‘작고 까만 소녀.’ 허수경 시인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다. 1988년 여름으로 기억한다. 그때 나는 실천문학사 편집장이었다. 주섬주섬 퇴근할 준비를 하는데, 진주에 산다는 작고 까만 소녀가 원고뭉치를 들고 찾아왔다. 

강태형 시인
먼 길 온 사람을 원고만 받고 그냥 보낼 수가 없어 함께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그가 한 말이 내게 아주 인상적이었다. 시도 안 써지고 막막할 때는 낫을 들고 공동묘지에 가서 벌초를 했노라고. “아무 묘나?” 내가 묻자 그는 그랬노라고, 지쳐서 힘이 다 빠지고 막막한 절망도 몸에서 빠져나갈 때까지 그저 눈앞의 묘를 벌초했노라고 말했다.

그때 받은 원고뭉치가 허수경의 첫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다. 지금은 대부분의 문학 독자들이 뛰어난 시인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지만, 당시 완벽한 무명이었던 허수경의 첫 시집을 출간하면서 언론사의 서평 기사는 전혀 기대하지 못했다. 좋은 시집이니 그저 오래 기다리면서 눈 밝은 독자들의 선택을 기다려보자 생각했다. 그런데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박스기사도 아니고 일간지의 한 면을 이 시집의 서평 기사로 가득 채운 것이다.

한국일보 김훈 기자의 서평이었다. 지금은 ‘칼의 노래’의 소설가로 세상에 알려진 김훈 선생은 당대의 문학기자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신문 지면이 지금보다 훨씬 적었던 시절이었다. 무명 신인의 첫 시집 서평에 한 면을 할애한다는 것은 믿기 힘든 파격이었다.

최근 인터파크가 발표한 ‘올 들어 8월 초 현재까지 소설 분야 베스트셀러 상위 100권을 분석한 결과 대부분이 영화나 드라마 등 영향을 받은 미디어셀러이거나 저자 파워가 큰 기성작가의 신작으로 나타났다’는 분석 자료를 보고 떠올린 일화다. 인터파크 분석을 소개하는 기사들이 흥미롭다.

‘성인 월평균 독서량 0.8권. 10명 가운데 3명이 한 달간 책 단 한 권도 읽지 않는 현실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독서량 꼴찌라는 처참한 결과를 낳았다. 2014년, 대한민국 독자는 스스로 책 고르는 법을 잊었다.’

사실은 ‘스스로 책 고르는 법을 잊은’ 게 아닌지도 모른다. 입시교육은 받았으나 독서교육은 받지 못하고, 가장 중요한 성장기에 교과서와 참고서 외의 다른 책은 별로 읽지 못한 사람들은 책 고르는 법을 아예 모를 테니까.

이런 현실에서 언론사 출판담당 기자들의 역할은 중요하다. 유명 저자의 책만 읽고 미디어에 노출된 책만 찾는다 해도 책을 읽는 독자는 소중하다. 그렇게 책읽기의 세계에 입문한 사람들은 그다음 책을 찾는다. 미디어에서 가끔이라도 무명 신인 저자들의 책을 소개해주면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매주 토요일에 방영되는 KBS ‘TV 책을 보다’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는 것도 매우 고무적이라고 생각한다. 보다 많은 독서인들이 볼 수 있는 시간대로 옮겨졌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한 달에 한 번쯤은 신인의 첫 책이나 국내 무명 저자들의 좋은 책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이 소중한 프로그램이 보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장수했으면 좋겠다.

지금은 ‘미디어셀러’라는 말이 조금은 부정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게 현실이지만, 어떻게든 책을 이야기하고 책 읽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좋은 책은 반드시 그다음 독서의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고, 미디어셀러라고 불리는 많은 책들이 대부분 충분히 좋은 책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오랜 독서인들이 꼽는 ‘내 인생의 책’은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책이 대부분이다. 그만큼 독서의 오랜 단계가 필요한 책인 경우도 있지만, 의외로 읽기 쉽고 가벼운 책인 경우도 많다. 사람들의 영혼과 마음은 그만큼 각기 다른 세계를 갖고 있으므로 어쩌면 지금 내게 절실한 책은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가 아닌, 아무도 찾지 않는 서점의 먼지더미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강태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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