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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과 결핍의 남녀관계… 인생의 허망함이여

입력 : 2014-08-28 20:50:41 수정 : 2014-08-28 20:5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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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신작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65)의 신작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양윤옥 옮김·문학동네)이 국내에서 출간됐다. 독자들이 많은 이 작가의 작품집은 출간 전부터 화제였다. 지난해 치열한 선인세 경쟁을 치렀던 장편소설에 비하면 그나마 조용히 출간된 셈이다. 막판에 작가가 한국판에 추가했다는 ‘사랑하는 잠자’만 빼면 이 작품집에 수록된 단편들은 대체로 겉도는 남녀관계의 허무를 배경 삼아 인력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생의 쓸쓸한 심연을 공통으로 드러낸다.

이 소설집 단편들에 등장하는 아내나 애인은 대부분 남자를 속이거나 배신한다. 첫머리에 배치한 ‘드라이브 마이 카’의 주인공 남자는 연기를 하는 프로 배우다. 이 남자의 아내도 배우인데 같이 연기를 한 남자 배우와 매번 잠을 잔다. 남편은 이 사실을 알지만 모르는 척 연기를 하는데 대체 왜 다른 남자와 자는지 제대로 물어보기도 전에 아내는 자궁암에 걸려 빠르게 죽고 만다. 죽은 아내의 속마음이 궁금했던 남편은 아내와 마지막으로 잔 남자를 찾아가 대화를 나눈다. 이 남자는 오히려 남편에게 묻는다.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우리가 속속들이 안다는 건 불가능한 일 아닐까요?”

‘예스터데이’의 기타루라는 삼수생 청년. 그와 절친이었던 대학생 ‘나’는 기타루의 강권으로 그의 대학생 애인 에리카와 ‘문화교류’ 차원에서 데이트를 한다. 기타루는 에리카와 초등학교 시절부터 만나 고락을 같이해온 가까운 사이였지만 근친의 느낌과 자격지심으로 이성 간 결합에는 장애를 겪고 있다. 기타루는 친구인 나를 중간에 끼워넣어 애인을 탐색하고자 한 것인데 사소한 엇갈림으로 셋은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16년이 흐른 후에야 에리카를 우연히 만나 그들의 운명을 가른 헛헛한 이별의 실체를 접한다.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던 기타루는 정작 다른 남자와 잔 에리카가 나와 잔 것으로 오해했던 모양이다.

여자들이 배신을 하는 것은 여자들의 죄가 아니라고 하루키는 ‘독립기관’에서 해명한다. 도카이라는 52세의 성형외과 의사, 이 남자는 독신으로 살면서 쿨하게 남녀관계를 누리는 선수다. 이 남자는 늘 남편이 있거나 애인이 있는 여자의 ‘세컨드 연인’을 자처했다. 그녀들에게 늘 부담 없는 ‘우천용 보이프렌드’이거나 적당한 ‘불륜 상대’로 살아야 언제든지 안전하게 다른 여자들에게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남자가 어쩌다 다섯 살배기 딸이 딸린 남편 있는 여자에게 진짜로 사랑에 빠졌고, 그 여자의 어이없는 ‘배신’에 상처받아 음식을 거부하고 고통받다 죽는다. 그 여자가 정작 남편도 도카이 자신도 아닌, 엉뚱하게 제3의 남자에게 가버린 것이다. 하루키는 진술한다.

“모든 여자는 거짓말을 하기 위한 특별한 독립기관을 태생적으로 갖추고 있다는 것이 도카이의 개인적인 의견이었다. 어떤 거짓말을 언제 어떻게 하느냐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모든 여자는 어느 시점에 반드시, 그것도 중요한 일로 거짓말을 한다.”

‘도쿄 기담집’ 이후 9년 만에 단편을 묶어 소설집을 펴낸 무라카미 하루키. 그는 “‘여자 없는 남자들’이란 나라는 인간의 ‘현재’에 대한 메타포일지 모른다”고 일어판 서문에 썼다.
평생 쿨한 연애를 도모했지만 “로프로 이어진 두 척의 보트처럼 줄을 끊으려 해도 끊어낼 칼을 찾지 못한” 도카이도 자신의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독립기관을 지닌 것이라고 하루키는 진단한다. 그리하여 “우리 인생을 저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고,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마음을 뒤흔들고, 아름다운 환상을 보여주고, 때로는 죽음에까지 몰아붙이는 그런 기관의 개입이 없다면 우리 인생은 분명 몹시 퉁명스러운 것이 될 것”이고 “혹은 단순한 기교의 나열로 끝나버릴 것”이라고 설파한다. 한밤중 1시가 넘은 시각에 생면부지의 남자로부터 옛 여자가 죽었다는 전화를 받는 표제작 ‘여자 없는 남자들’에서 하루키는 쓸쓸하게 진술한다.

“한 번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어버리면 그 고독의 빛은 당신 몸 깊숙이 배어든다. 연한 색 카펫에 흘린 레드 와인의 얼룩처럼. …당신은 연한 색 페르시아 카펫이고, 고독은 절대 지워지지 않는 보르도 와인 얼룩이다. 그렇게 고독은 프랑스에서 실려 오고, 상처의 통증은 중동에서 들어온다. 여자 없는 남자들에게 세계란 광대하고 통절한 혼합이며, 그건 그대로 고스란히 달의 뒷면이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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