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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앞 회화나무 그 풍성한 그늘서 지친 영혼 위로받다

입력 : 2014-08-28 21:36:37 수정 : 2014-08-28 21: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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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100> 그늘
# 미로에서 길을 잃다


가톨릭교회의 수장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나라를 다녀갔다. 그는 밝은 미소를 머금고 비행기에서 내려, 내내 힘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겸손하게 몸을 낮추고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의 모습에서 그동안 여러 가지 일로 지친 사람들이 위안을 얻고, 멀리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사람들까지도 몸과 마음이 치유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불확실한 삶은 복잡한 미로를 헤매는 듯 늘 우리를 곤경에 빠뜨리곤 한다. 그러한 어두움을 물리치고 갈 길을 밝혀주는 빛, 그중에서도 특히 사람에게서 나오는 빛이야말로 빛 중에서도 가장 밝은 빛일 것이다. 아주 오랜만에 우리는 그러한 빛을 만났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282년 만에 탄생한 비유럽권 교황이라고 떠들썩했다.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예수회 소속의 신부로 봉직했으며, 형식을 깬 행동들과 소탈한 생활로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본명은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Jorge Mario Bergoglio)이다. 우리는 아르헨티나 출신 호르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또 하나 알고 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아주 유명한 소설가이며 독서가이다. 그의 소설은 전부 단편들인데 ‘환상적 사실주의’라고 일컬어지는 독특한 분위기의 이야기들이다. 마침 얼마 전 나는 보르헤스의 ‘알레프’라는 소설을 읽었다. ‘알레프(Aleph)’는 히브리어의 첫 글자이고 무한집합을 의미하는 글자이다. 또한 눈먼 보르헤스가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이기도하다.

그 책은 죽음과 미로로 가득한 보르헤스의 세계였다. 특히 제일 인상에 남았던 이야기는 미로에 살고 있다가 테세우스에게 죽임을 당하는 미노타우로스의 이야기인 ‘아스테리온의 집’과 미로를 가지고 장난치다가 미로에 갇히는 이야기인 ‘두 명의 왕과 두 개의 미로’였다.

잘 설계된 미로를 건설한 바빌로니아 왕이 자기의 왕국을 방문한 아라비아 왕에게 장난 삼아 미로에 들어가게 한다. 느닷없이 미로에 갇히게 되고 헤매다 겨우 빠져나온 아라비아 왕은 큰 굴욕을 느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당황과 분노를 내색하지 않고, 바빌로니아 왕에게 자기의 나라에도 미로가 있으니 한 번 방문해 달라고 청하며 그 나라를 떠난다. 그는 아라비아에 도착하자마자 군사를 모아 바빌로니아를 습격하고 결국 함락한다. 그리고 왕을 포로로 잡아 묶고 낙타에 태워 사흘간 사막 한가운데로 데리고 간다. 거기서 그는 “바빌로니아에서 당신은 내게 수많은 계단과 문과 벽으로 만들어진 청동 미로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게 하려고 했소. 이제 전지전능하신 알라께서 당신에게 미로를 보여 주도록 허락하였소. 그곳에는 올라갈 계단도 없으며 힘들게 열어야 하는 문들도 없고, 돌아다녀야 할 진저리 나는 복도들도 없으며 당신의 길을 막을 벽들도 없소”라고 이야기한 후 끈을 풀어 주었다. 그리하여 바빌로니아 왕은 벽이 하나도 없는 미로에 갇혀 결국은 굶어죽게 된다.

벽이 없는 미로의 이미지는 무척 강력한 상징이었다. 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또한 미로다.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이다. 혹은 사막이다. 그늘이 없고 물도 없이 하루 종일 땡볕에 내 머리와 어깨와 등을 노출한 채 헉헉거리며 그늘을 찾아다녀야 하는 사막이다.

사람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견고한 벽이 있으나 정작 나를 지켜줄 안온한 벽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것이 통하는 길이지만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길이 없는 그런 불가해하고 초현실적인 환경에 둘러싸여 있다. 그런 현상은 단지 도시화가 불러온 슬픈 현실만이 아니라, 아주 전염성이 강한 질병처럼 정도를 가리지 않고 번지고 있다. 

조계사 대웅전과 회화나무. 대웅전은 보천교 법당이었던 ‘십일전’(十一殿)을 옮겨왔다.
# 도시의 번잡함을 덮어주는 조계사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오아시스가 필요하고 온몸을 달구는 땡볕을 피할 수 있게 해주는 그늘이 필요하다. 사람들 사이의 길이 막히고 비와 땡볕을 가려줄 그늘이 없을 때, 사람들이 찾을 수 있는 곳은 어떤 절대적인 곳, 말하자면 종교적인 장소들이다. 사람들에게 그런 그늘을 드리워주는 장소라면 먼저 명동성당 같은 곳이 떠오른다. 그리고 종로 한복판에 있는 조계사가 있다.

인사동에서 광화문 쪽으로 길을 건너면 수송동이 나온다. 수송동은 원래 수동과 송현의 앞 글자만 따온,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을 정비하며 무성의하게 동네 이름을 합쳐 지을 때 만든 이름이다.

500년 된 조계사 백송.
송현이란 예전에 소나무가 울창해서 ‘소나무 언덕’이라는 의미를 집어넣었다는데, 지금 조계사 주변은 울창한 소나무 숲 대신 웅장하고 아주 건조한 건물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앞으로 나무가 두 그루 있을 뿐이다. 한 그루는 도로에서 조계사를 들어가는 방향에서 보이는 500살 먹은 백송이다. 예비군처럼 초록과 흰색이 섞인 피부를 가지고 있다가, 어느 순간 온통 하얀색으로 갈아입기를 수백번 했음에도 아직도 청청한 것을 보면 늘 경이로운 생각이 든다. 그리고 대웅전 앞마당에는 백송에 비해 젊기는 하지만 그래도 수령이 450년이 된다는 회화나무가 한 그루 서있다. 수령은 백송에 비해 어리지만 덩치가 훨씬 크고 무성한 잎과 풍성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 조계사에 들어서면 그 나무가 그 공간의 주인처럼 보인다.

그 나무를 보기 위해 나는 가끔 조계사에 간다. 물론 서울 한복판에 있어서 쉽게 가볼 수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내가 그곳에 가는 이유는 사람을 포근히 안아주는 그늘이 있기 때문이다. 조계사는 그리 오래된 사찰이 아니다. 주로 일제강점기에 벌어진 여러 가지 역사를 품고 있는 곳이다. 한때는 권세가의 사가였고 한때는 근대식 교육을 수행하던 학교였던 땅에 한용운, 박한영 등이 주축이 되어 세운 절이다. 그리고 한국 불교를 이끌고 있는 조계종의 중심 역할을 하는 곳이다.

절의 분위기는 우리가 아는 선적이고 영적인 기운이 감도는 그런 호젓하고 엄숙한 공간이 아니라, 도시 안에 관광객이 그득하고 늘 이런저런 행사로 번잡한 곳이기도 하다. 그 한가운데 있는 대웅전으로 말하자면, 전북 정읍에서 발흥한 신흥종교인 보천교(증산교의 일파)의 법당이었던 ‘십일전(十一殿)’을 보천교 교주였던 차경석이 죽은 후 사들여서 옮겨 지은 건물이다. 일제의 조선사찰령에 반대하여, 만해 스님을 비롯한 여러 스님이 모여 현 조계사인 태고사를 창건한 것이 70여 년 전의 일이다. 당시 한국 불교의 자존을 상징하기 위해 궁궐 양식을 일부 도입하여 현재와 같은 규모(정면 7칸, 측면 4칸, 약 512㎡)가 되었으며, 지어질 당시 중앙청과 종로 사이에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한다. 그리고 그 넓고 높은 절 안에 홀로 모셔지던 아주 수려한 용모의 목각 석가여래상은 영암 도갑사에서 옮겨왔다.

어찌 보면 그저 그런 곳이고 늘 여러 가지 사회문제들에 관련되어 수선스런 곳이지만, 단순한 종교시설로 보기에는 무척 넓은 품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회화나무는 넓은 그늘을 드리운 채 그 번잡스러움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 그 그늘 아래 서면 누구나 신분과 직업과 재산의 높낮이가 소거된 채 ‘신 앞에 선 단독자’가 되어버린다. 이런 것이 아마 종교가 원하는 이상세계가 아닐까.

조계사의 그늘에 기댄 사람들.
# 사람끼리 서로 나누는 따뜻한 그늘


내가 조계사를 알게 된 건 불과 십 년 전의 일이다. 어느 날 나는 인사동에 갔다가 우정국로 건너편에 조계사가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비로소’라는 말이 조금 우습기는 한데, 대충 안국동로터리에서 종로 쪽으로 가는 길 변에 조계사가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앞에 올망졸망 모여 있던 상가 건물들에 가려서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길이 마침 어릴 적 나의 통학로여서 어릴 때부터 그 앞으로 줄곧 지났으면서도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조계사가 사우를 확장하며 길 앞을 가리던 건물을 철거하자, 마치 의자를 끌어 앞으로 나오듯 대로변으로 절이 쑥 나오게 된 것이다.

길을 건너서 들어가 보니, 마침 그때 대규모 정비공사를 하느라 절 안은 온통 공사용 비계와 자재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숫자만큼 사람들도 가득했다. 대웅전은 지붕을 수리하는지 기와를 모두 걷어내어 골조는 큰 비닐 막으로 덮여 있었고, 천장에 가설구조물을 걸어놓고 부재를 고치는 중이었다. 그 어수선한 풍경 아래서 태연하게 사람들이 모여서 예불을 하고 행사를 하고 있었다. 뭐랄까, 내가 평소에 알고 있던 종교적인 이미지와는 너무나도 다른 풍경이었다. 나는 대웅전 한 귀퉁이에 앉아서, 모르는 집에 처음 놀러온 손님처럼 머쓱하게 그 풍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높고 넓은 법당 안에 딱 사람 크기만 한 부처가 한 분 모셔져 있었고, 사람들은 공사장의 한가운데 앉아 있었고, 여기저기 열린 틈으로 들어온 비둘기, 참새 등이 왔다 갔다 하며 공양 올린 과일이며 쌀알을 쪼고 있는 그 묘한 풍경을.

보통 절이라고 하면, 진입하는 공간에서부터 가장 신성한 곳인 법당까지의 어떤 위계와 규칙이 있는데, 이 절은 그런 규칙이라고는 아무리 꿰맞춰도 찾아지지 않았다. 들어가자마자 대웅전이 한가운데 있고, 그 앞에 큰 회화나무가 법당보다 더 높고 넓게 앉아 있고, 그 앞으로 마치 관중석처럼 나무로 대충 만든 벤치들이 듬성듬성 놓여 있고, 사람들은 그 벤치에 앉아서 법당을 무심히 쳐다보고 있다. 

삶이 아주 힘들어 보이는 허름한 차림의 사람들, 야무진 표정으로 무언가를 기원하는 부인들, 말쑥한 양복을 차려 입고 회화나무 주위를 돌고 가는 중년 신사, 경내를 오가며 분주히 일하는 관계자들…. 누군가는 백팔배를, 누군가는 삼배를 올리고, 누군가는 향초에 불을 붙이며, 누군가는 엎드려 경을 읽는다. 그러다 예불 시간에 이르러도, 해인사나 송광사처럼 많은 스님들이 정연히 모여 일제히 읊는 법문 소리가 사위를 압도하는 광경과는 사뭇 다르다.

한국불교 대표 종파인 조계종 제일교구 본사인 조계사. 마음으로 보지 않으면, 보아도 보는 것이 아니라고, 조계사라면 그 고유명사가 주는 이런저런 선입견이 없지 않았다. 그 때문에 ‘답사’라고 벼르고 별러 땅끝 미황사나 화순 쌍봉사 같은 먼 데 절까지 굳이 찾아다니면서도 조계사는 선뜻 다가가기 힘든 곳이었다.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봉정사 극락전처럼 몇 백 년의 연륜을 가진 것도 아니요, 무릎을 치는 배치나 다시없는 보물을 지닌 것도 아니지만, 가까이, 너무나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이 조계사만의 매력이다.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삶이 고단할 때가 아니라도, 어렵게 일상을 떠나지 않고도, 어깨를 짓누르는 보이지 않는 짐을 잠시 덜고 올 수 있는 곳. 그리고 그 풍성한 그늘에 들어가 사람들이 서로 품어주고 안아주고 서로 그늘을 드리워주는 따뜻한 세상을 꿈꾸게 하는 곳, 그런 편안함 때문에 사람들은 조계사가 품은 그늘로 기꺼이 들어간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집, 도시를 만들고 사람을 이어주다’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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