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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문학노트] 모래가 찍어주는 구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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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8-01 21:56:24 수정 : 2014-08-01 21:5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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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떠나는 휴가철, 산·계곡·해변에서 책 읽는건 ‘엑스터시’
풀벌레·풀잎과 하나, 마음 설레지 않는가
새벽 매미 울음에 눈을 떴다. 밤이 되어도 폭염의 기운이 가시질 않아 내내 잠을 설친 탓에 매미 소리가 더 민감하게 들렸을 것이다. 전국이 연일 폭염경보로 들끓고 있다. 대낮에 햇볕 아래 오래 서 있다가는 쓰러지기 십상이다. 제아무리 컴컴한 땅속에서 길게는 17년까지 기다리다 세상에 나와 잠시 짝짓기를 한 뒤 죽는 기구한 생이라지만, 겨우 든 잠을 깨우는 매미 소리가 달가울 리 없다. 그 소리도 언제 어떤 심정으로 접하느냐에 따라선 달리 들린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당대 여류 시인 설도(薛濤·768∼832)는 “이슬에 씻은 듯 맑은 소리/ 멀리서 울려옵니다//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와/ 잎사귀 사이 가지런히 해줍니다// 소리마다/ 이어지고 이어져// 가지가지/ 깃들어 있습니다”(유희재 역)라고 ‘매미[蟬]’라는 시를 지었다. 이슬에 씻긴 맑은 소리라니! 어려서부터 총명해 8∼9세에 이미 시를 지을 줄 알았던 설도는 부친이 일찍 죽는 바람에 기적(妓籍)에 들어 재능과 미모로 이름을 널리 알린 여인이다. 그네가 직접 붉은 종이에 시를 써서 문인들에게 헌상한 ‘설도전(薛濤箋)’은 요즘으로 치면 베스트셀러에 해당하는 문집이었다고 한다. 설도가 묘사한 ‘이슬에 씻은 듯 맑은 소리’를 내는 주인공은 바로 자신이었다.

설도가 태어날 무렵 세상을 떠났던 두보(杜甫·712∼770)는 사족이 필요없는 당대 최고 시인이었다. 그는 벼슬길에 오르려고 애를 썼지만 두 번이나 과거에 낙제했다. 실망스러운 마음을 달래며 이백, 고적 같은 시인들과 여기저기 유람하며 시를 주고받는 시절을 보냈다. 뒤늦게 마흔네 살에 벼슬길에 올랐지만 이마저 전란으로 인해 오래가지 못했다. 그가 잠시 벼슬을 살던 시절의 시 한 편을 보면, 아무리 시성(詩聖)이라도 일상에 갇힌 답답함은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어서 웃음이 나온다.

“칠월 엿새 초가을인데도 찌는 더위에 시달려/ 밥상을 마주하고도 도저히 못먹겠네/ 안그래도 밤마다 전갈에 물릴까 걱정인데/ 어쩌자고 가을인데도 파리떼가 유난스러운지// 미칠 것 같은 이 관복, 고함이라도 치고 싶은데/ 서류들은 어쩌면 이리도 빨리 쌓이는 것이냐/ 남으로 바라보니 푸른 소나무 계곡에 서려 있는데/ 아아, 맨발로 얼음장 밟아볼 날 있을 것인가”(김의정 역)

두보가 758년 마흔일곱에 쓴 ‘날씨는 찌는데 서류들은 쌓이고’라는 시편이다. 어제(1일)가 마침 음력으로 바로 칠월 엿새인데, 당시에는 음력 칠월이면 초가을로 쳤던 모양이다. 냉방시설도 없었던 옛날에 점잔 빼는 관복을 걸치고 서탁 앞에 앉아 있어야 했으니 시인의 답답함이 오죽했을까.

바야흐로 휴가 시즌이다. 예나 지금이나 휴식은 삶의 필수 항목이다. 산이나 바다를 찾아 떠나는 것도 좋지만 어디를 가든 정신의 재충전도 소홀히 할 수 없다. 평소에 읽고 싶었던 책 한두 권 들고 떠나는 건 문명인이라면 세면도구를 챙겨가는 일만큼 자연스러운 일이다. 프랑스 소설가 필리프 들레름은 “해변에서 책을 읽으면 몸으로 책을 읽는 기분이 든다”면서 “책장 위로 날아든 모래들은 활자 위에 추가로 덧붙여진 구두점처럼 보인다”고 에세이집 ‘첫 맥주 한 모금’에 썼다.

모래가 구두점을 찍는 순간부터 책은 죽은 활자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자연과 소통하는 열린 공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책과, 책을 읽는 사람과, 대지와, 바람과 모래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게 되는 그런 몰입 혹은 망아(忘我)의 상태야말로 엑스터시의 한순간일 터이다. 해변이 아니라도 좋다. 산이나 계곡에서 책장 위로 기어오르는 풀벌레 한 마리나 어디선가 날아든 이파리 한 장까지 활자와 더불어 읽어내는 열린 공간의 독서, 설레지 않는가. 밤의 강가에서 집필한 두보의 시 한 대목.

“달, 강물, 배, 사람/ 바람에 흔들리는 등불/ 밤은 깊어가고/ 물가 잠든 물오리/ 떼 지어 조용한데/ 배 뒤쪽/ 고기들 펄쩍 뛴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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