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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10월 항쟁’ 진실규명 특별법 제정 촉구

입력 : 2014-07-31 21:06:54 수정 : 2014-07-31 21: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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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족들 여섯번째 위령제 지내
“최대 1만명 좌익몰려 학살” 주장
“이제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부모님께 향이라도 피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31일 오전 대구 달성군 가창댐 수변공원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 십수명이 모였다. 이들은 이른바 ‘대구 10월 항쟁’의 유가족들이다. 대구 10월 항쟁은 광복 이듬해인 1946년 10월1일 식량 부족을 겪고 있던 대구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 미 군정이 식량 공출정책을 강압적으로 시행하자 시민 수만명이 경북도청과 대구부청, 대구역 등에 몰려 식량과 생존권을 요구하며 벌인 시위다. 그러나 미 군정과 경찰은 이들을 좌익세력으로 몰아붙이며 총을 겨눴다. 

1946년 10월2일 미 군정의 식량정책에 반발해 거리에서 이틀째 시위하던 대구 시민들이 경찰들을 피해 달아나고 있다.
10월항쟁유족회 제공
더 비극적인 사건은 4년 뒤 일어났다. 6·25전쟁 직후인 1950년 7월31일을 전후로 해 대구형무소에 갇혀 있던 이들은 이곳 가창골과 경북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대량 학살당했다. 북한이 남침하면 이들이 북한군에 동조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당시 사망한 민간인은 약 2574명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유족들은 1만명에 이를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후 가창골은 1959년 가창댐이 생기면서 수몰됐다.

2010년 정부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대구 10월 항쟁을 ‘사건’으로 명명했다. 진실위는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에서 미 군정이 친일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 공출정책을 강압적으로 시행하자 불만을 가진 민간인과 일부 좌익세력이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서 발생한 사건’으로 규정했다.

반세기가 넘도록 ‘빨갱이의 가족’으로 묶이며 피멍 든 삶을 살아온 유족들은 이제 매년 이곳에서 제를 올리고 있다. 올해가 여섯 번째로 열리는 위령제다.

채영희 유족대표는 “10월 항쟁의 진실이 밝혀져 다시는 이 땅에 잘못된 역사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며 “진실 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고 평화공원을 조성하는 등 진실화해위원회의 권고사항을 이행해줄 것을 대구시에 요구하겠다”고 말했다.

대구=이정우 기자 woo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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