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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3년 전에 멈춰버리고, 전기료 아까워 불도 못켜고, 1평 남짓 공간이 삶터 전부지만…
찾아와주는 ‘온정’이 있으니 즐겁고, 몸은 불편해도 한달음에 달려가고, 그래서 정겹다
좁디좁은 영등포 쪽방촌 골목에서 목발 짚은 한 주민이 장대비를 맞으며 힘겹게 공터로 나선다. 대한적십자사가 부식 세트와 여름용 홑이불, 수박화채를 나눠주는 행사장이다. 시작하려면 1시간이나 남았는데도 행사가 열리는 공터는 쪽방촌 주민들로 가득 찼다. 주민들은 이런 후원행사를 ‘꿀맛 같은 시간’이라고 표현했다.

이학수 할아버지 방에 걸린 달력이 2011년 5월에 멈춰 있다.
정정심 할머니가 전기료를 절약하기 위해 전등을 끄고 생활하고 있다.
과거 경인선 철길을 따라 난립했던 성매매업소들이 하나둘 사라지면서 생겨난 게 영등포 쪽방촌이다. 쪽방촌 초입에는 아직도 ‘24시간 청소년 통행금지구역’이라는 표지판이 걸려 있다. 한낮에도 술에 취해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 전기료가 아까워 불을 끄고 살아가는 노인들, 무료 점심을 먹기 위해 길게 줄을 서는 주민들이 있다. 영등포 쪽방촌 거주자는 600여명에 이른다. 절반 이상이 월 46만원의 정부보조금이 수입의 전부인 기초생활수급자다. 65세 이상 홀몸 노인이 100여명이고 장애인은 140여명이나 된다.

결핵 환자인 여복영 할아버지의 방에 약 봉지들이 놓여 있다.
서울 영등포역 인근 쪽방촌에 사는 정정심 할머니가 그림이 그려진 벽쪽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
결핵을 앓고 있는 여복영(71) 할아버지는 다리까지 불편해 집 밖에 나서는 것조차 힘들다. 월세 10만원짜리 1평 남짓한 방 바닥엔 약 봉지와 살림살이가 흩어져 있다. 성인 한 명이 겨우 누울 공간이다. 언제 세탁했는지 알 수 없는 이불도 널브러져 있다. 쾨쾨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창문도 없는 어두운 방은 찜질방처럼 후덥지근하다. 

유중근 대한적십자사 총재(왼쪽 두 번째)가 24일 영등포 쪽방촌을 찾아 주민들에게 부식세트와 여름용 홑이불 등을 전달하고 있다.
한 할아버지가 목발을 짚고 대한적십자사 행사장으로 향하고 있다.
“한낮에는 숨쉬기조차 힘들어서 문을 열어놓고 지내요. 마땅히 씻을 곳도 없고…. 그래도 옷을 벗고 있으면 되니 겨울보다는 낫죠.” 

대한적십자사 유중근 총재(오른쪽)와 김영식 여성봉사특별자문위원(왼쪽)이 24일 영등포 쪽방촌을 찾아 이학수 할아버지에게 부식세트와 여름용 홑이불 등을 전달한 후 수박화채를 먹여주고 있다.
영등포 쪽방촌의 한 수리공이 장맛비 속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30년간 교도소 수감생활을 한 이학수(78) 할아버지 집 달력은 아직도 3년 전 5월에 멈춰 있다. 그즈음 할아버지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매일 같은 일상을 보내는 할아버지에게 달력은 그저 휑한 방 안을 채워주는 소품일 뿐이다.

영등포 쪽방촌 출입구에 ‘더불어 사는 세상’이란 문구가 적혀 있다.
점심 시간이 되자 영등포 쪽방촌 무료급식소 앞에 주민들과 노숙인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쪽방촌의 계절은 여름과 겨울밖에 없다고 한다. 무더위와 싸우고 나면 곧 추위와의 싸움이 시작된다. ‘올겨울은 얼마나 추울까. 연탄 값도 만만찮을 텐데.’ 이런저런 걱정으로 한 해가 지나갈 것이다. 달력도 멈춰버린 이학수 할아버지의 쪽방촌 3년은 얼마나 길었을까.

사진·글=이재문 기자 moo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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