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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규의후마니타스에세이] 연암의 국제정치 讀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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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7-25 21:25:58 수정 : 2014-07-25 21:2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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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는 국제정치경제 보고서
네트워크 외교로 운신의 폭 넓혀야
최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이 여러 뒷얘기를 낳고 있다. 시 주석은 한국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참여를 요구해 미국 측 반발을 샀고, 광복절·항일전쟁 승리 70주년 한·중 공동기념식 개최를 제안하면서 일본을 압박했다. 한·중 관계의 방향에 쐐기를 박으려는 것이다. 동북아 질서 새판짜기 외교전의 일환이다. G2(주요 2개국)인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우리나라는 운신의 폭이 줄었음을 새삼 깨닫게 됐다. 어떻게 처신할지 심각하게 고민할 시점이다.

박완규 기획·온라인담당 부국장
요즘 동북아 정세를 보면 연암 박지원(1737∼1805)의 시대를 떠올리게 된다. 인조반정 이후 집권세력은 두 차례 호란을 겪고 북벌(北伐)을 지배이념으로 삼지만, 연암 시대에는 북학(北學)이 서서히 부상한다. 연암을 좌장으로 하는 북학파가 이념보다 실리를 중시하면서 청나라가 토벌 대상에서 학습 대상으로 바뀐 것이다. 오늘날 동북아에서 탈냉전 시대의 새 질서를 모색하는 움직임과 흡사하다.

연암은 1780년 청나라 건륭제 칠순잔치에 파견된 사신의 비공식 수행원 자격으로 요동·산해관·북경을 거쳐 열하(承德·승덕)까지 각지를 둘러본 뒤 ‘열하일기’를 펴냈다. 부국이민(富國利民) 사상을 담은 소설 ‘허생전’을 넣는 등 내용과 문체가 파격적이고 해학적이어서 많이 읽혔다.

“풍속이나 관습이 치란(治亂)에 관계되고, 성곽이나 건물, 경작·목축이나 옹기장이·대장장이 일의 일체 이용후생의 방법이 모두 그 가운데 들어있어야만, 비로소 글을 써서 교훈을 남기려는 원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리라.” ‘열하일기’ 서문의 말이다. 연암은 박제가가 지은 ‘북학의’ 서문에서 “장차 학문을 하려면 중국을 배우지 않고 어떻게 할 것인가”라며 “법이 좋고 제도가 아름다우면 오랑캐라 할지라도 떳떳하게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나라 신문물의 장점을 받아들여야 낙후한 조선이 부강해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중화주의에 매몰되지는 않았다. ‘열하일기’에서는 “중국이 세계 안에 존재하는 것이, 검은 사마귀 하나가 얼굴에 점 찍혀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며 중국 중심 천하관을 비판했다. 새로운 국제질서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이다.

연암이 “열하에 이르러 천하의 형세를 살펴본 것”도 흥미롭다. 장성(長城) 밖 열하의 황제 행궁 ‘피서산장’에 대해 “이름은 ‘피서’라 했지만 그 실상인즉 천자가 몸소 나가서 변방을 방비한 것”이라고 했다. 황제가 티베트의 판첸 라마를 스승으로 삼아 황금 전각에 살게 한 것도 “전각 속에 가두어 두고 하루라도 세상이 무사할 것을 기원하는 것”이라고 분석한 데는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그 시절 세계 최강국이던 청나라가 국제질서를 이끌어가는 방식을 꿰뚫어 본 것이다. ‘열하일기’는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라 ‘외국이라는 새로운 공간’을 찾아낸 국제정치경제 보고서라는 게 학계의 평가다.

‘허생전’에서는 북벌의 묘책을 묻는 질문에 허생이 이렇게 대답한다. “국내의 자제를 가려 뽑아 머리를 깎고 되놈의 옷을 입혀서, 지식층은 가서 과거에 응시하고, 서민은 멀리 강남에 장사로 스며들어 그들의 모든 허실을 엿보며, 그들의 호걸들과 결탁한다면 그제야 천하의 일을 꾀함 직하고 국치를 씻을 수 있을 것이다. … 우리나라는 잘되면 대국의 스승 노릇을 할 것이고, 못되어도 백구지국(伯舅之國, 제후 중 가장 큰 나라)의 지위를 잃지 않을 것이다.” 북벌의 허구성을 질타하면서, 인적 교류와 네트워크 외교를 통해 청에 영향력을 행사하자고 제의한 것이다.

이제 실리외교, 균형외교에 힘을 기울일 때다. 양자택일이 아닌, 양자와의 공존이 시대정신이다. 그러려면 한 세대, 한 세기 앞을 내다볼 수 있는 방향감각을 지니고, 외교 현안에 전략적으로 접근하면서 활동공간을 넓혀나가야 한다. 국정 책임자나 정부 당국자만의 일이 아니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이러한 인식을 공유해야 올바른 판단과 실천이 가능해진다. 나아가 주변국들과의 네트워크를 활성화해 새로운 문명 표준을 만들고 주변국들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연암에게 배울 점이 많다.

박완규 기획·온라인담당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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