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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타워] 병자호란은 과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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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7-22 22:19:58 수정 : 2014-07-22 22: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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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 교체기 조선 안일한 외교로 난 불러
동북아 갈등 큰 요즘‘반면교사’로 삼아야
이달 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을 계기로 조선의 17세기가 새삼 조명을 받고 있다. 그 바탕엔 조선이 사대(事大)했던 명나라의 국력이 쇠하고 여진족의 후금(청나라)이 동북아 패권국으로 부상한 당시 정세가 중국의 굴기(堀起)로 미국의 동북아 패권이 도전받고 있는 작금의 상황과 유사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동북아 패권 지형도가 새로 그려질 때마다 우리가 생존의 기로에 서는 것은 대륙·해양 세력 사이에 낀 한반도의 지정학적 숙명이다. 역사평설 ‘병자호란’의 저자인 명지대 한명기 교수가 서문에서 “병자호란은 ‘과거’가 아니다. 어쩌면 지금도 서서히 진행되고 있는 ‘현재’일 수 있으며, 결코 오래된 미래가 되지 않도록 우리가 반추해야 할 ‘G2(미·중) 시대의 비망록’이다”라고 쓴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역사가 기록하고 있듯이, 17세기 조선의 국왕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다. 후금은 ‘떠오르는 태양’, 명나라는 ‘지는 해’로 봤기 때문이다. 반면 사대사상에 매몰된 조선 신료들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내세우며 광해군에 맞섰다.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옹립(인조반정·1623년)한 조선은 친명 노선을 고수하다 끝내 대청(大淸)제국으로 강성해진 여진의 침략(병자호란·1636년)을 자초했다. 인조는 송파의 삼전도에서 오랑캐 수장이라고 멸시했던 청 태종 홍타이지 앞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치욕이다. 조선 백성은 인조나 조정 신료보다 더 참혹한 수난을 당했다. 청군은 철수할 때 조선 백성 수십만명을 끌고갔다.

병자호란으로 능욕당한 조선의 원혼들은 21세기 한반도에 “자강(自强)만이 살길”이라고 통곡한다. 광해군은 말했다. “중원의 형세가 참으로 위급하다. 이런 때에는 안으로 자강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써서 한결같이 고려가 했던 것처럼 한다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행동이 따르지 않았다. 광해군은 성곽을 쌓고 장병을 기르는 데 써야 할 소중한 재원을 궁궐을 짓는 데 탕진했다. 신료들은 틈만 나면 광해군을 흔들었고 광해군은 왕권 강화를 위해 정적(政敵)을 내치는 권력투쟁에 몰두했다.

조남규 외교안보부장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후금군에게 격파된 이후에도 조선은 단결하지 않았다. 쿠데타로 광해군을 내쫓은 서인(西人) 정권도 입으로만 전쟁을 외쳤다. 전쟁은 준비하지 않고 화친(和親)만을 반대했다. 후금이 쳐들어오자 임금(인조)은 수도를 버렸고 장졸은 창을 버렸다. 군 최고통수권자와 지도층이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자 조선은 유린됐다. 임진왜란 때도 그랬고 6·25전쟁 때도 그랬다. 17세기 조선의 집권 세력은 임진왜란의 교훈을 잊었고 6·25전쟁 당시 이승만정부는 병자호란의 교훈을 잊었다.

17세기 조선이 취한 대외 전략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광해군 집권(1608년) 당시 조선과 명나라는 동맹이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함께 치른 혈맹 관계였다. 위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왜구의 침략에 맞서 조선을 구해준 명나라의 은혜(再造之恩·재조지은)를 저버려선 안 된다는 여론도 팽배했다. 아직 후금은 요동 지역도 평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광해군은 금나라가 강성해질 때까지 화친조약을 거부하며 항전했던 고려의 전례를 따르는 것이 더 실리적이지 않았을까. 물론 이런 가정은 부질없다. 인조반정을 전후한 시점에 여진은 더 이상 명나라와 조선이 맞설 수 없을 만큼 강한 제국이 돼 있었다. 그렇다면 인조와 서인 정권은 현실을 직시하고 광해군의 실용주의 노선을 계승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이 또한 부질없는 가정이다.

조선은 시대착오의 대명사인 돈키호테처럼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모험주의로 치달았다. 정작 싸워야 할 때는 싸우지 않고, 더 이상 싸움이 무의미할 정도로 대세가 기울었을 때는 허상의 명분에 사로잡혀 치욕의 역사, 수난의 역사를 기록해 간 17세기 조선은 격동의 동북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선명한 반면교사로 다가온다.

조남규 외교안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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