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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처럼 읽히는 형상·텍스트에 ‘예술의 혼’ 입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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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7-21 20:32:37 수정 : 2014-07-22 08: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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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완식이 만난 사람] 신병을 작업으로 승화시킨 오윤석 작가 지나치는 사람을 바라만 봐도 영상과 텍스트로 그가 읽혔다. 그가 처한 상황과 앞으로 있을 일까지 영화 스크린처럼 스쳤다.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누군가에게 이런 상황을 말한들 이해해 주는 이들도 없었다. 웬 뚱단지 같은 소리를 하나 핀잔을 받기 일쑤였다. 오윤석(43)작가는 그렇게 살아왔다. 작업은 유일한 위안이자 치유였다. 지리산에 들어가 산중 기도와 명상에 빠져들기도 하고 인도 등지를 떠돌기도 했다. 무속인들은 사주관상을 봐주는 점집을 동업하자고 조르기도 했다. 불가 입문을 권하는 스님도 있었다. 산사를 찾은 불자들에겐 영험한 보살로 통했다.

무속과 불교를 넘나들며 신병을 작업으로 승화한 오윤석 작가. 그는 “일반인들에게 믿거나 말거나 식의 생소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이 쑥스럽다”면서도 “작품의 긍극적 효용가치는 마음의 평화와 치유라는 점에서 용기를 냈다”고 털어놓았다.
“어린 시절엔 영화관에서 시각적인 호사를 누리면 그런 ‘증상’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신기하게 사라졌어요.”

그는 대전에서 영화관을 운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조부가 운영하던 극장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어두운 공간에 환한 빛과 움직이는 동작들, 그리고 생경한 음향들이 그렇다. 뛰어놀던 극장의 뒤뜰엔 극장 벽체를 타고 오른 담쟁이 넝쿨과 이끼들이 무성했고, 쓰레기장엔 찢어진 영화표와 알아보기 힘든 스틸 사진들이 수북했다. 그 뒤편으론 극장 간판을 제작하는 간판실이 있었다. 늘 페인트 냄새와 간판쟁이 아저씨가 반겨주었다.

“영화 장면들이 그려진 간판과 화려한 포스터들이 쌓여 있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70mm 영사기가 돌아가는 영사실 작은 창으로 들여다본 관람석은 별세계였지요. 제 주변 환경 자체가 ‘시네마 천국’이었던 셈이지요.”

그는 10대 초반에 처음으로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길 가던 어느 아저씨로부터 “나는 3000원밖에 없어”라는 환청이 들려왔다. 멀어져 가는 아저씨 뒷모습에 보이는 검은색과 읽기 어려운 글씨들은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저 금전관계려니 했다. 중학교 시절엔 이 같은 알 수 없는 풍경들이 자주 펼쳐졌다.

“저 혼자서 풀기에는 버거운 문제였지요. 하지만 신기하게도 극장에서 끊임없이 영화를 보고 나면 안정이 됐어요.”

그가 대학에서 시각예술인 미술을 전공하게 된 배경이다. 시각은 그에게 치유 요소가 됐다. 사람 등 대상을 바라보면 텍스트로 읽히는 현상을 역이용해 작업했다. 텍스트를 형상으로 해석해 작업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 시절엔 대학가 축제에 불려다니며 손금 봐주는 알바를 하기도 했다. 길가다 손금 봐주는 풍경을 우연히 접하면서 시작됐다.

“내민 손바닥을 지켜보고 있는데 손금의 선과 형의 해석이 저절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거예요. 저만의 해석과 표현이 만들어져 주위 사람들을 봐주게 되었지요.”

그는 대학 축제때 인연이 된 학우들의 역학 공부를 이끌었다. 산속에 들어가 풍수 공부도 했다. 친구들과 아예 업으로 나설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영적인 기운에 사는 이들에겐 꼭 고난의 시절과 시험의 시기가 있게 마련이다. 그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학원 시절 방황이 시작되고 스스로를 사람들로부터 유폐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매일같이 주변 산에 가는 것으로 시간을 때웠습니다. 새벽, 아침, 뜨거운 낮 그리고 어두운 밤에도 산기운이 좋아 산에서 마냥 서성거렸어요. 그렇게 2년 이상 나를 찾는 시간을 보냈지요.” 이후 그는 스님들로부터 지리산의 좋은 기도터를 소개 받는다. 새로운 인물들과 교류 폭도 넓혀 나갔다.

이즈음 그는 한 무속인의 권유를 받게 된다. “은이 너의 몸속에 달라붙어 있는 귀신을 떼어 줄 것이다”라는 말에 은반지며 은판 등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아예 은으로 작업을 했다.

“처음엔 잠도 잘 오고 여러 증상도 사라지는 효과가 있었어요. 하지만 일주일도 안 되어 방언까지 튀어나왔어요.”

그러다 은작업에 건조함을 느끼고 다시 방황을 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 사주를 풀어주었고, 작업도 잘되나 싶었는데 밀려오는 신기를 어찌할 수 없었다. 

칼로 그린 회화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 한지를 오려 꼬아 놓은 모습이 화면에 잔잔한 질량감을 주고 있다.
“휴대폰도 안 터지는 지리산 뱀사골로 찾아들었지요. 미리 기도터에 자리를 잡고 있던 법사는 저를 제자 삼겠다며 흥분하고, 보살들은 밤마다 불러내 이야기를 청했어요. 나흘이 지나면서 아니다 싶어 자리를 옮겼어요.”

그는 조용한 기도터에서 7일간의 명상에 몰입하게 된다. 스스로를 다스리는 법을 익혔다.

“자연의 기운이 방언 조절법 등 하나하나 저를 가르쳤습니다. 깊은 산 기운에 편안한 마음과 여유를 되찾았지요.”

작업도 좋아지면서 덴마크 전시에 초대돼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는 갈증이 몰려왔다. 갑자기 인도여행을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를 다녀와서 스님이 되고자 했어요. 그런데 제가 너무 보잘것없어 보이는 거예요. 속내를 들여다 보니 아직도 제 스스로를 내려놓지 못한 아집이 있음을 깨달았지요. 보잘것없다는 분별심마저도 넘어서는 세계지요.”

그는 지리산에 다시 들어간다. 상당한 시간 기도명상에 빠져든 어느 순간 산의 울림 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승려가 되려거든 불경을 파라.” 그 소리에 눈을 뜬 그는 불현듯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향해 달려갔다. 하산 후 한지 위에 사경하듯 금강경을 쓰고 오려내기 시작했다. 캔버스 위에 한지를 붙이고 오려내는 조형작업의 연원이다.

그는 예술가의 길은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샤먼의 길이라 했다. 그가 불발됐던 신의 나라 인도와 네팔 여행을 재도전한 이유다.

“왜 그리 신들이 많을까 생각해 보았어요. 다양한 중생들의 주파수에 맞게 친절하게 형상화된 모습들이지요.”

그는 형상과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작가의 행위’와 형상과 이미지의 신을 모시는 ‘종교적 행위’는 결국 같은 뿌리라고 말한다. 그는 최근 1년여에 걸쳐 쓰고 오려낸 ‘금강경’ 작품을 완성했다. ‘반야심경’ 작품은 한창 진행 중이다.

작업의 참신성에 그는 상업화랑은 물론 대안공간에서까지 러브콜을 받고 있다. 중국과 독일 레지던시 경험을 통해 그는 요즘 새로운 작품을 모색하는 데 여념이 없다. 칼로 오려낸 끝 부분을 돌돌 말아 꼬아 놓음으로써 화면에 색다른 질감을 부여하고 있다. 캔버스 바탕색과 색을 입힌 한지 조합의 극대화다. 접합의 미학이다. 문자추상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오랜 시간 걸리는 정교한 작업이라 그에게 치유와 수양의 방편이 되고 있다. 30일까지 갤러리아트사이드 개인전서 그를 만나볼 수 있다. (02)725-1020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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