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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없이 증쇄만… 내용은 20여년째 초판 그대로 ‘박제신세’

관련이슈 국어死전…맥끊긴 민족지혜의 심장

입력 : 2014-06-30 06:00:00 수정 : 2014-07-01 10: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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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死전 맥끊긴 민족지혜의 심장] (1) 국어사전의 몰락 그 시절 졸업식의 숨은 주인공은 사전이었다. “공부 좀 했다”는 졸업생이면 전교생이 줄 선 운동장 사열대를 올라가서 교육감, 경찰서장, 농협조합장 등 동네 VIP가 주는 상장의 부상으로 각종 사전을 받기 마련이었다. 그중에서도 검은색 가죽표지에 금박으로 이름 적힌 민중서림의 ‘엣센스 국어사전’은 학창 생활의 훈장이었다.

요즘 학생은 엣센스 국어사전을 모른다. 손때 묻혀가며 국어사전을 보거나 두툼한 사전으로 머리를 괴고 조는 모습은 사라졌다. 한때 지식과 권위를 상징했던 국어사전은 속이 말라 비틀어진 박제 신세가 됐다.

신어 정리만 해 놓고… 경기 파주 민중서림 편집국 한쪽에 놓여있는 신어카드. 사전 개정 작업을 대비해 만들어놓은 것이지만 수년간 개정하지 않아 활용된 적은 없다.
◆먼지 쌓인 신어 카드


‘사전의 명가’였던 민중서림에 남아 있는 국어사전 편찬자는 고명수 편집위원 단 한 명이다. 사실상 우리나라 출판업계에 남아 있는 마지막 국어사전 편찬자다. 지난 4월 그를 만나러 간 경기 파주 민중서림 편집국 한쪽에선 국어사전 편찬의 유물이 된 ‘신어 카드’가 수년째 내려앉은 먼지에 덮여 있었다. 사전에 새로 실어야 할 단어 이름과 뜻을 적은 신어 카드는 2008년부터 작성이 중단된 상태다.

“오랫동안 사전에 실제 신어를 넣지 못했어요. 개정을 안 했으니까.” 고 편집위원은 신어 카드를 바라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종이사전을 만들어봐야 일년에 100권, 200권도 안 팔리니 아예 만들지를 않아요. 먼저 전자사전이 나오고 스마트폰이 나오면서 중고생들도 종이사전을 안 쓰니 2005, 2006년부터 사전 판매량이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왕년의 베스트셀러 엣센스 국어사전은 2006년 1월 출간된 6판이 마지막 개정이다. 그 이후에는 개정 없이 인쇄만 다시 하는 ‘증쇄’만 이뤄졌다.

◆침몰한 국어사전 출판사들

민중서림, 금성출판사, 두산동아 등 유명 출판사의 사전 출판 사업을 침몰시킨 건 국정 대사전의 등장과 인터넷 포털의 사전 서비스 제공이다. 국립국어원이 만든 표준국어대사전을 네이버가 공짜로 서비스하면서 다른 국어사전 설 땅이 없어진 것이다. 사전 판매가 급감하자 금성출판사는 “잘나갈 때는 20명이나 있었다”던 사전팀을 2010년 없앴다. 금성출판사 안상순 전 사서팀장은 “출판사가 포털에 각종 사전 콘텐츠를 넘길 때 헐값 논란이 있었다”며 “종이사전 판매 수익에 비하면 포털에서 주는 로열티는 정말 보잘 것 없었는데 종이사전이 없어지니 도저히 포털에서 받은 로열티만으로는 수익을 맞출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출판업계는 “수익이 나지 않는데 사전 개정을 어떻게 하느냐”고 입을 모은다. 대표적 국어사전 출판사 5곳(금성출판사, 민중서림, 교학사, 두산동아, 와이비엠 시사)에는 현재 국어사전을 만드는 이는 없고 판매하는 이만 다소 남아 있는 상태다. 소량이나마 꾸준히 팔리는 중·소형 국어사전은 2000년대 중반 이후 개정된 것이 없다.

◆사라지는 사전 편찬자

사전 편찬은 일생을 바치는 성실함과 열정이 필요하다. 아무나 할 수 없기에 인력 유지·양성도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사전을 연구하는 이만 늘어나고 정작 사전을 만드는 이는 찾기 힘든 상황이다.

“초창기 사전 편찬자 은퇴시기와 종이사전 쇠퇴기가 겹쳤어요.” 홀로 남아 사전 편찬실을 지키고 있는 고 위원은 회사에 후배가 없다.

대학 졸업 후 1984년 출판사에 들어온 고 위원은 50대의 ‘사전 베테랑’ 밑에서 일을 배웠다. 국어대사전 3판을 만들던 1990년대 초반에는 사전편찬실에만 50명이 북적거릴 정도였다.

출판업계에서 사실상 마지막 사전편찬인으로 남은 고명수 민중서림 편집위원.
하지만 사전 편찬 1세대가 일흔 넘어 은퇴한 2000년대 중반 이후 사전편찬실에선 사람을 거의 뽑지 않았다. “사전 작업에 익숙해지려면 4∼5년은 가르쳐야 해요.” 고 위원은 사전을 만들려고 해도 만들 사람이 없는 상황이 올까 걱정이다.

국어사전에 청춘을 바친 이들이 바라보는 국어사전의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안 전 팀장은 “사전 콘텐츠를 개발하는 곳이 출판사였는데 편찬팀이 문을 닫아 현재로서는 개발할 곳이 없다”며 “(단어를 찾는 것이 주 사용목적인) 종이사전은 디지털 환경(정보 검색)과 너무 잘 맞아 오히려 급속하게 쇠퇴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특별기획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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