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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억 투입 국정대사전 편찬후 민간사전 사실상 ‘용도폐기’

관련이슈 국어死전…맥끊긴 민족지혜의 심장

입력 : 2014-06-30 06:00:00 수정 : 2014-06-30 09: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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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死전 맥끊긴 민족지혜의 심장] 국어대사전의 역정 모국어 있는 나라에서 대사전은 그 나라의 보물이며 자존심이다. 통상 20만개 이상 표제어의 뜻풀이·용례·어원 등을 담아 언중(言衆)의 삶·사상·문화 등을 보전, 전달하며 다른 사전 편찬의 기반이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 국어대사전의 역사는 가시밭길투성이다.

사전편찬 작업 중인 조선어학회 회원들
◆천신만고 끝에 나온 조선말 큰사전

“포학한 왜정의 억압과 곤궁한 경제의 쪼들림 가운데서, 오직 구원한 민족적 정신을 가슴속에 깊이 간직하고, 원대한 문화적 의욕에 부추긴바 되어 한 자루의 모지라진 붓으로 천만가지 곤란과 싸워 온 지 열 다섯해만에 만족하지 못한 원고를 인쇄에 붙이었더니, 애닯도다, 험한 길은 갈수록 태산이어라, 기어이 우리말과 글을 뿌리째 뽑아버리려는 포학무도한 왜정은 기원 4275년 시월에 편찬회와 어학회와 관계된 사람 삼십여명을 검거하매, 사전 원고도 사람과 함께 흥원과 함흥으로 굴러다니며 감옥살이를 겪게됐다.” (조선말큰사전 머리말)

한글학자들이 일제 탄압에 의해 옥고를 치른 ‘조선어학회 사건’의 증거물로 일본 경찰에 압수됐다가 1945년 9월 옛 경성역 창고에서 발견된 ‘조선말 큰사전’ 원고.
최초의 국어대사전은 한글학회의 ‘큰사전’으로서 1929년 조선어사전 편찬회의가 만들어졌다.

이 대사전은 일제의 악랄한 민족문화 말살 정책 1순위 대상이었다. 1943년 함흥지방재판소에서 일본 재판부는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은 조선민족 정신을 유지하려는 민족운동의 형태”라며 내란죄를 적용해 국어학자 12명에게 징역 2∼6년을 선고했다.

이 중 이윤재와 한징이 옥사하고 나머지 학자들은 광복 후 자유를 찾았지만, 대사전 원고는 증거물로 이리저리 압송되는 과정에서 사라졌다. 다행히 1945년 9월 당시 경성역 조선통운 창고에서 무사히 원고를 찾아냈고 1947년 10월 9일 한글날에 맞춰 ‘조선말 큰사전’ 1권이 나왔다.

나라는 되찾았지만 사전 편찬의 어려움은 여전했다. 다행히 미군정 장교의 주선으로 ‘석유 왕’ 록펠러재단으로부터 3만6400달러어치의 종이와 책표지·인쇄잉크 등을 지원받은 덕분에 ‘큰사전’으로 이름을 바꿔 1957년 마지막인 6권을 출간했다. 무려 28년이 걸린 ‘대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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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사전 시대 연 이희승, 신기철·신용철 대사전

국어학자 이희승이 1956년 편찬에 착수해 1961년 민중서관(현 민중서림)에서 출간한 국어대사전은 상업적 성공을 거둔 최초의 대사전이다. 초판을 32쇄나 찍고 당시 사전 시장의 60%를 차지했다. 이후 30여년 간 ‘국어사전의 대명사’로 자리했다. 다른 베스트셀러는 1974년 나온 삼성출판사의 ‘새 우리말 큰사전’(신기철·신용철 편저)이었다. 당시 국어대사전 편찬은 돈이 되는 사업이었다. ‘새국어대사전’, ‘동아 국어대사전’, ‘금성판 국어대사전’ 등 후발 주자가 잇따라 나온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최초의 국정(國定) 대사전

국어대사전 발간 경쟁은 1991년 노태우정부 시절 문화부 초대 이어령 장관 지시로 국립국어원이 표준국어대사전(표준사전)을 편찬하면서 막을 내린다. 원래 2001년 발간을 목표로 시작됐는데 예정보다 3년 앞당겨진 1999년 3권 출간으로 마무리됐다. 예산 112억원이 투입됐는데 “ 임기 내 업적을 남기려는 김영삼·김대중 정부 욕심 때문에 졸속으로 만들어졌다”는 뒷말이 무성했다.

표준사전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호평은 “표제어 50만개, 7300여쪽의 역대 최대 규모로 언어생활의 규범을 명확하게 제시했고, 민간으로선 불가능한 시간과 인력·예산을 투입한 대작”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가 직접 사전을 만든 결과 ‘표준사전만이 옳은 것’이라는 그릇된 인식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다른 사전을 볼 필요성을 못 느끼게 돼 민간 사전 발전을 가로막았다는 비판도 있다. 내용 면에서도 “표제어 수에 치중해 용례가 부족하고, 현실에서 거의 쓰지 않는 사어가 들어가 있으며 일제 잔재가 남아 있다”는 부정적 평가가 끊이지 않았다.

표준사전 출간 이후 민간 출판사의 국어대사전 편찬은 정지됐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에서 2009년 나온 ‘고려대 한국어대사전’은 1993년 편찬이 시작됐다. 고명수 민중서림 편집위원은 “표준사전이 나온 결과 다른 대사전은 용도가 다 됐다”고 말했다.

특별기획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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