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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조선 지식인 ‘서양 문물’ 마음껏 탐하다

입력 : 2014-04-30 21:47:34 수정 : 2014-04-30 21:4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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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록으로 본 조선·청나라 지식 교류 1720년 9월 27일, 청나라에 파견된 사신단의 일원이던 이기지는 서양의 책을 보던 중 성모 마리아의 그림이 갖고 싶어졌다. 그림 주인은 이기지의 부탁을 들어줄 듯하다 거절하며 “천모(天母)의 상을 함부로 대한다면 모두에게 좋지 않다”고 말했다. 이기지는 설득에 나섰다.

“천주(天主)의 가르침이 만약 우리나라에서 행해진다면 여러분의 공이 될 것이다. 천주의 그림이 유포된다고 무슨 해가 되겠는가.” 

귀신을 그린 ‘귀취도’는 청나라 화가 나빙의 대표작이다. 그림 감상은 조선, 청나라 지식인들의 교류에서 중요한 형태였다. 실학자 유득공은 1790년 연행에서 이 그림을 본 뒤 연행록 ‘열하기행시주’에 “매우 진귀하고 기괴하다”는 평을 남겼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조선후기는 천주교 박해, 서학 탄압으로 기억되지만 이기지의 언행에서는 이런 분위기를 읽을 수 없다. 청나라를 통해 서양을 접하기 시작할 무렵 조선 지식인들은 개방적이었다. 중국을 넘어 새로운 세상을 인지하며 세계관을 넓혔다. 청나라 지식인과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는 데도 적극적이었지만 제약도 많았다. 최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펴낸 ‘18세기 연행록 기사 집성-서적·서화편’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서양 그림, “조물주를 능가할 만하다”

중국에 파견된 사신단의 기록은 현재까지 전하는 것이 441종이다. 멀게는 고려 시대의 것도 있는데, 이 중 18세기인 숙종∼정조 시대에 작성된 ‘연행록’이 122종으로 가장 많다.

청나라에서 보고 들은 바를 공유하고, 토론하는 분위기가 고조되던 시기였던 셈이다. 이는 ‘르네상스기’ 조선의 자신감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저자에 따라 편차는 있지만 청나라에서 접한 천주교, 서학에 대한 평가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 태도다.

이기지의 ‘일암연기’에는 서양의 문물에 대한 관심과 감탄이 적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기지는 나비, 꿀벌 등을 그린 그림을 보고 “책을 펼치면 갑자기 벌레와 물고기가 꿈틀거리며 움직이거나 날아올라 마치 손에 잡힐 듯했다”고 평가했다. 성(城), 해자를 표현한 그림에 대해서는 “원근과 고저(高低)의 형상을 볼 수 있게 했다”며 “솜씨의 교묘함이 조화옹(造化翁·조물주)을 능가할 만했다”고 극찬했다. 교회 병풍에 그려진 ‘두 날개가 있는 것’에 대해 물어 “천신(天神)이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지만 이 신이 몸을 지켜준다”는 대답을 듣기도 한다.

이상봉은 ‘북원록’에서 ‘천주당’에서 나눈 필담을 통해 서양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그는 서양에서도 공자, 부처에 대한 인식을 묻는데 공자는 존경하나 부처는 배척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천주교를 통한 서양 접촉은 조선에서 세계인식의 변화, 실학의 확산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신익철 교수는 “중국 외에 서양 세력에 대해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세계지도에서 이런 변화가 표현됐다”며 “사신들이 서학서를 국내에 들여와 돌려보기도 했다. 성호 이익은 서양사상을 두루 섭렵한 학자”라고 말했다.

◆지식인 교류, 각종 제약에 시달리다

조선의 엘리트로 구성된 사신단은 중국 지식인과 만나 서로를 탐색하는 한편 지식을 나눴다. 이때 핵심이 되는 것이 책이었다. 서로가 어떤 책을 읽는지를 물었고, 조선 사신단은 중국의 최신 서적을 입수하는 데 열을 올렸다. 그런데 책을 통한 교류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제약 혹은 견제가 있었다. 연행록에는 이런 흔적이 곳곳에 드러난다.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에는 조선에서 어떤 책을 읽는지를 궁금해하는 중국 황제에게 어떻게 대답할지를 두고 상의하는 사신단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황제는 “어떤 서적이건 감추지 말고 가져오라”고 요구하는데 사신들은 금서, 병서(兵書)를 포함시킬지를 두고 고민했다. 트집 잡히지 않기 위해 거짓말이라고 해야 하나 싶었던 것이다. 신 교수는 “당시는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는 여전히 불편한 때였다. 청 황제의 물음이 문화적인 관심에서 비롯된 것인지, 조선의 허실을 탐지하기 위한 것인지를 사신단은 가늠해 봐야 했다”고 설명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는 홍대용의 ‘담헌연기’와 더불어 조선 후기 ‘3대 연행록’으로 꼽힌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천문 정보를 담은 역법(曆法) 서적을 사려다 금서라는 이유로 퇴짜를 맞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역법책을 사려는 사신단에게 청나라 인사가 “중국 사람도 감히 팔지 못하고, 서양인도 감히 보내줄 수 없다”고 전한다. 이기지의 일암연기가 전하는 일화다. 민감한 정보의 해외 유출에 대해 청 정부가 상당한 통제를 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책 거래의 형식에 따른 제약도 있었다. 사신단은 ‘서반’(序班)이라는 중국 관리를 통해 책 거래를 해야 했는데, 이들은 사신단이 사적으로 책 거래를 하지 않는지를 감시했다. 홍대용은 ‘담헌연기’에서 “서반들은 내가 그들 몰래 서적을 살까 염려해서, 반드시 따라다니면서 감시하였다. 달래도 보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 이들은 내가 유람하는 것을 항상 저지하려 했다”고 적었다. 또 “(서반의 거래 독점으로) 물건 값이 해마다 올랐고, 혹 그들 몰래 샀다가 온갖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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