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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교육은 인류에 공헌할 사람 만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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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4-18 20:35:53 수정 : 2014-04-19 01:3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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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 나누며] 모국 인재 육성 앞장 재미교포 이덕선씨 “기부를 하면 제 나중 삶이 좋아지는 게 아니라, 지금이 행복해지는 겁니다.”

지난 15일 서울 강남구의 한 호텔에서 만난 재미교포 사업가 이덕선(74) 전 얼라이드테크놀로지그룹(ATG) 회장은 밝은 표정이었다. 올 2월 사업에서 손을 뗐지만 자신의 세례명을 딴 ‘매튜리 파운데이션’을 만들어 꾸준히 기부와 봉사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모교인 한국외국어대학교의 60주년을 기념하고 기부금(100만달러)을 약정하기 위해 방한했다. 이 전에도 기부했지만 액수를 밝히기를 꺼렸다.

외대 미주동문연합회 회장인 이 전 회장은 2012년 3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방한 당시 환영 편지를 썼다. 그는 이 편지에 외대의 특징은 외교와 비즈니스 분야 등 다양한 분야의 인재를 양성한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오바마 대통령은 연설문에서 이를 그대로 인용했다. 외대에 있는 ‘오바마 트레일(오바마 대통령 동선)’ 벽에는 이 구절이 새겨져 있다. 외대는 오바마의 방한을 기념해 지하 캠퍼스를 ‘오바마 홀’이라고 이름 지었다. 본관 2층에는 ‘이덕선 회의실’을 만들었다.

이 전 회장은 오바마 대통령이 외대에 방문할 수 있도록 물밑 지원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의 방문이 이 전 회장의 공이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손사래를 쳤다. “내가 한 일이 뭐가 있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외대는 해외에 진출하는 사람들을 중점적으로 키우는 대학이니까, 국내외 여러 분야에 리더를 양성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오바마 대통령이 서울에 오셨을 때 외대에 가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 싶었어요.”

이 전 회장은 “지난 수십년간 외대는 큰 발전을 했다. 미래 진취적이고 큰 희망이 있는 학교로. 그래서 외국인 교수도 많고, 외국 학장들도 많고, 앞으로 국제 분야에서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자랑스럽다”며 애정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아메리칸드림을 모국의 학생들에게 나누고자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2009년부터 한국을 이끌 인재를 양성하는 데 기여하기 위해 아버지 이름을 붙인 ‘버나드 원길 리 국제포럼’을 가톨릭대학에서 진행하고 있다. 그는 “좋은 교육은 머리만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을 만드는 것”이라며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인류에 공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목표로 10년간 주제를 정한 뒤 권위 있는 사람을 초청해 연설을 하고, 세미나를 하기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009년과 2011년 가톨릭대학에 150만달러씩 300만달러를 기부했다. 

이덕선 전 얼라이드테크놀로지그룹(ATG) 회장이 지난 15일 서울 강남구의 한 호텔에서 편안한 옷차림으로 아메리칸드림의 성공과 은퇴, 기부, 종교적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제원 기자
이 전 회장은 ‘몰타 기사회’라는 조직의 회원이기도 하다. 가톨릭 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조직인 이 기사회는 바티칸과 유사한 일종의 국가이자 NGO 단체다. 회원이 1만3000명이며 120개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 회장은 이 조직에 속한 한국인 3명 가운데 하나로 매년 봉사를 위해 각국을 방문하고 있다. 그는 “기사회를 통해 어려운 국가들을 도와줄 수 있다”며 “지난번 일본 대지진 때도 일본을 도와주었는데, 북한에 일이 생기면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자신의 성공비결을 한마디로 자신보다 똑똑한 사람을 뽑아 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주 간단해요. 나보다 똑똑하고, 나보다 잘나고, 나보다 잘생기고, 나보다 키가 큰, 뭐든 나보다 잘하는 사람을 뽑는 거. 그런 사람을 불러서 칭찬해주면 직원들은 알아서 잘합니다. 그 공을 그 직원한테 주면 저절로 내가 올라가게 돼 있어요. 다만, 나보다 잘난 사람을 채용할 수 있는 태도와 용기, 능력이 있어야 하겠지요.”

이 전 회장의 삶은 말 그대로 아메리칸드림이었다. 1950년 황해도 연백군에 살던 그는 전쟁의 포화를 피해 아버지와 함께 서울로 내려왔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더 그의 아버지 원길씨는 천호동에서 가톨릭 구제회를 통해 전달받는 구호물자로 급식소를 운영하며, 주민들에게 한글을 알려주는 등 봉사가 몸에 밴 사람이었다. 이 전 회장의 기부와 봉사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DNA이다.

이 전 회장은 1965년 가톨릭 구제회에서 일하며 고아들을 미국으로 입양하는 일을 맡았다. 이 회장의 손으로 미국에 간 고아가 수백명이다. 관련된 일을 하다 보니 관심이 많아졌던 이 전 회장은 ‘기회의 땅’ 미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친척집에 얹혀 살면서 컴퓨터 관련 교육을 받은 뒤 슈퍼컴퓨터를 만드는 회사에 취직했다. 그는 “3년간 죽어라 일만 했다”고 회상했다. 실력을 인정받아 1969년 ‘웨스텟’으로 옮긴 그는 직원 30명의 회사를 1989년 부회장직에서 그만둘 때 3000명으로 키웠다. 이후 IT 회사인 ATG를 설립한 뒤 미 국무부와 국방부 등과 계약을 맺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을 했다.

정선형 기자 linea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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