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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만史설문] <11> ‘미스터 대동법’의 대동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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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3-09 21:16:55 수정 : 2014-03-17 17:2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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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자들 더 부담하게 하는 ‘조선판 경제 민주화’ 동아시아에서 대동(大同)은 큰 철학이자 사회운영의 원리였다. 유토피아 사상의 하나로 해석할 수도 있는 대동은 유가(儒家) 경전의 하나인 예기(禮記)에 그 뜻이 설명되어 있다.

가족이나 겨레 등 세상을 이루는 구성원들 사이에 내 것 즉 사(私)라는 개념이 없어 경쟁과 쟁탈이 벌어지지 않으며, 안녕과 질서를 위해 따로 예(禮)를 규제할 필요가 없는 소박하고 원초적인 공(公)의 상태라는 것이 교과서적 정의(定義)다. 물론, 뜻은 아름답지만 시대마다 지배세력의 도구 이데올로기로 활용된 면도 있다.

‘대동단결’, ‘대동세상’ 등 좋은 세상 만들자고 시위하는 이들이 구호로 활용하는 그 ‘대동’이기도 하다. ‘크게 같다’는 말은 단순하나 그 기운은 만만치 않다. 대동소이(大同小異), 작은 차이는 있으나 대의(大義)는 같다는 얘기다. 자잘하게 놀지 말란다, 큰 땅 대륙의 기상이 눈에 보이는 듯. 우리는, 익히 배웠듯, 만주(滿洲)와 요동(遼東)을 주름잡던 겨레다.

우리 역사에서 이 단어 대동은 그런 ‘정치적 이데올로기’ 말고도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조선 후기, 왜적들과 오래 벌인 전쟁 임진왜란으로 찌들 만큼 찌든 백성들의 삶을 부추겨 주자는 세제(稅制)의 혁신이 대동법이었다. 요즘 식으로 경제민주화다.

대동법(大同法)이라는 이 이름을 누가, 어떤 이유로 붙였을까. 공공(公共)의 큰 뜻을 위해 가진 자들이 좀 더 부담하고, 없는 사람들은 덜 내는 그런 당연한 원리가 그때까지는 무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혁신에는 상대가 있는 법, 쉽기만 했을까?

영의정을 지낸 김육의 초상화. ‘미스터 대동법’으로 불려도 될 만큼 담대하게 이 정책을 펼쳤다. 굶기 일쑤이던 백성들의 ‘밥’이 그 덕분에 늘었다.
경기 남양주 실학박물관 소장
전세(田稅)와 공(貢), 역(役)이 당시 백성의 주요 의무였다. 땅 마지기 숫자대로 세를 물리는 것이 전세다. 공은 특산물·진상품 등과 같이 실제 물건 즉 현물로 ‘바치는’ 또 하나의 세목(稅目)이었다. 이를 운반하는 데 드는 품[역(役)]도 함께 부담했다. 군대에 가거나 성(城)을 짓는 것과 같은 공공의 공사에서 일을 하는 것이 역이다.

공은 가구(家口)를 기준으로 부과했다. ‘배 터져 죽겠다’는 놀부집이나 밥 대신 끼니 걱정을 먹던 흥부집이나 가리지 않고 ‘한 집당 얼마’ 하는 식이었다. 흥부집도 쥐어짜고 패면 뭔가 나오겠지만, 양심과 학식 있는 일부 관리들 가슴은 많이 아팠으리라.

‘고쳐라’, ‘바꾸자’ 말도 많았고 여러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기득권자들의 노련하고 세련된 방해 공작과 논리가 매번 이런 노력을 주저앉혔다. 관리나 양반들은 제 부담이 늘어나니 싫고, 토산물과 진상품을 대신 납부해주고[방납(防納)] 그 대가로 엄청난 이득을 취해 온 관청 주변 상인들도 이 ‘황금알 낳는 닭’을 포기할 수 없었다.

‘미스터 대동법’ 김육(金堉·1580∼1658)이 등장했다. 초년 관리 시절 그는 필화(筆禍)사건으로 관직을 잃고 농사로 연명했다. 그의 의기(義氣)를 아껴 찾아간 사람들은 일터 곁 논두렁에 앉아 얘기를 나눴다. 뒤늦게 다시 관직에 오른 김육은 효종 때 영의정에까지 오른다.

그런 인연으로 그는 ‘밥이 백성의 하늘’임을 잘 알았다. 양반 관리들이 ‘하기 싫다’,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피했던 그 일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충청도 관찰사 때 공물법(貢物法)을 폐지하고 대동법을 실시했다.

충청도 백성들이 그의 은덕을 만세(萬世)토록 잊지 말자고 갹출(醵出)하여 세운 송덕비인 조선국 영의정 김공육 대동균역 만세불망비.
향토사학자 김해규씨 제공
1651년 효종 2년의 일, ‘백성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했다. 그의 승진으로 대동법도 확대됐다. 현물 대신 쌀 한 가지로 내도록 한 것도 이 제도의 또 한 포인트다. ‘(크게) 한 가지로 내도록 한 것이 대동의 뜻’이었다고도 해석한다. 후에는 베[포(布)]로, 돈으로도 냈다.

그가 세상을 뜨자 특히 충청도 백성들이 ‘부모를 떠나보낸 것처럼’ 슬퍼해마지 않았던 까닭이다. 상가에서 부의금을 받지 않자 이를 모아 고인의 공덕을 추모하는 비석을 만들게 해달라고 청원한다. 경기도 평택시 소사동에서 이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충청도에서 서울로 향하던 첫 번째 역원(驛院)이었던 소사원에 1659년 이 비석이 세워졌다. 원(院)은 역의 부속시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요즘 공식 명칭은 ‘대동법시행기념비’다. 이 이름으로는 당시 수많은 백성들의 간곡한 추도(追悼)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

비석은 ‘조선국 영의정 김공육 대동균역 만세불망비(朝鮮國 領議政 金公堉 大同均役 萬世不忘碑)’란 문구로 시작한다. 김(金)과 육(堉) 사이에 공(公)을 쓴 것은 존경의 뜻. 대동법과 균역으로 백성을 사랑해준 은공을 오래 잊지 않겠다(말자)는 뜻이다. 고인에 대한 백성들의 사랑인 것이다.

‘대동법 시행 기념비각’이라는 (공식) 이름이 붙은 경기 평택시 소사동의 만세불망비 비각과 주변 경관.
평택시 제공
명실상부(名實相符), 이름과 내용이 부합되어야 정명(正名)이다. 그 제목은 마치 이 제도를 시행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나라가 세운 것처럼 읽힌다. 내용과 다르다. 그 제목 탓인지, 거의 모든 다른 자료들도 나라가 세웠다고 적거나 은근슬쩍 누가 세웠는지의 언급을 빼고 있다.

교사이며 향토사학자인 김해규씨는 “이 이름 때문에 후세들이 기쁜 상상력을 펼치는 데 지장이 많다”고 말한다. 역사를 바로 이해하는 데에도 장벽이 된다는 설명이다. 어진 관리와 고마움을 아는 백성 사이의 아름다운 마음의 소통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이름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의 당국자는 그 정책에 ‘대동’이라는 담대한 타이틀을 붙여 뜻을 담았다. 함께 잘 살자는 마음이었으리라. 그 후손들은 관련 문화유산의 이름 하나 제대로 달지 못하는 당국자들의 무심함(?) 때문에 역사가 빚은 아름다운 우정의 꽃을 놓치고 있다. 이름은 본디를 가리킨다. ‘기념비’란 이름에 감동할 사람은 많지 않다.

강상헌 언론인·우리글진흥원장 ceo@citinature.com

■사족(蛇足)

“대동여지도와 대동법의 ‘대동’이 같은 것 아니냐?” 이메일로 온 질문. 이 전에 게재된 글 중 동해(東海)와 독도(獨島)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개념들에 관한 궁금증일 것이다. 질문한 이의 진지한 자세에 퍽 기뻤다. 서둘러 대동법 이야기까지 작성한 동기다.

중국의 동쪽이라는 뜻에서 우리는 전통적으로 동녘 동(東)을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말로 여겼다.

대동은 우리가 스스로 존경하는 의미로 크다는 글자[대(大)]를 붙인 것이다. 대동법이 우리 역사의 유명한 제도이니 그 ‘대동’이 대동여지도의 ‘대동’과 같은 것이리라 하는 짐작이다. 상당수 시민들에게 한자가 부재(不在)한 시대,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같을 동(同)의 옛 글자. 무릇 또는 모두 범(凡)자와 입 구(口)자를 합쳐 ‘같다’, ‘한 가지’라는 새 뜻의 글자를 빚었다.
우선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와 대동법(大同法)의 한자를 제시하여 그 둘이 다른 말임을 설명하고자 한다. 한쪽은 ‘같을’ 또는 ‘한가지’라는 뜻의 동(同)이 쓰였다.

한자어(漢字語)는 발음이 같아도 글자가 다르면 거의 모두 다른 뜻이다. 글자가 다른 것은 차이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동(同)자는 무릇 또는 모두의 뜻인 범(凡)자와 입 구(口)자의 합체다. ‘모두가 하나다’, ‘서로 같다’는 뜻으로 쓰기 위해 만들었다. 갑골문 시절에 이미 만들어진, 역사 오랜 글자로 문자학자들은 본다. ‘크게 같다’는 대동(大同)은 대동(大東)처럼 깊은 뜻을 보듬고 있다. 한자에 좀 익숙해지면 글자만으로도 이를 직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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