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日 후쿠시마 원전사고 3년… 돌아오지 않는 봄] (上) 모리아이초 가설주택 르포

입력 : 2014-03-02 22:50:02 수정 : 2014-03-12 15:02:23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대부분 70∼80세 노인들
가재도구 하나 못 챙기고 고향 떠나 홀로 피난 생활
자식들도 뿔뿔이 흩어져 행복했던 옛생각에 눈시울
클릭하면 큰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은 이곳에서 ‘오와리(끝)’이다.”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던 지난달 26일 오후 3시, 후쿠시마(福島)시 모리아이초(森合町)의 한 가설주택.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로 후타바(雙葉)군 나미에초(浪江町)에서 피난온 마츠다 노리아키(松田範明·78)는 사연을 얘기하다 말고 이렇게 말을 흐렸다. 처진 그의 어깨 위에 내걸린 사진 속에선 원전 재가동을 서두르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각료들과 함께 웃고 있었다.

마츠다는 나미에초 사람들이 피난해 있는 이곳에서 3년째 혼자 생활하고 있다. 지난해 생일(11월30일)도, 올해 설도 혼자였다. 공간이 협소(보통 19.8∼29.7㎡)해 자식들을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새벽 3시에 일어나 혼자 식사를 해결하고 오후 7시쯤 잠드는 고단한 생활의 연속이다. 이날은 분위기 전환을 위해 근처에서 꽃을 사와 꽃병에 꽂기도 했다.

“정부의 방사능 제염 작업이 너무 느려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머지않아 80세인데, 결국 80이 넘으면 이곳에서 죽어야 할지도 모른다. ‘괜찮으냐’고 매일 건강 상담은 받고 있지만….”

마츠다는 이곳에 오기 전 나미에초에서 자식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곳은 야산이 많아 공기도 좋았고 농사의 특성상 잠시도 쉴 틈 없이 움직여야 했다. 큰 돈을 벌진 못했지만 즐겁고 건강했다. 

지난달 26일 후쿠시마시 모리아이초의 한 가설주택 안에서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로 후타바군 나미에초에서 피난해온 마츠다 노리아키(松田範明·78)가 가족들의 사진을 한없이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2011년 3월11일 발생한 대지진과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는 모든 것을 앗아갔다. 사고 당시 딸의 집에 머물고 있던 그는 높은 방사능 선량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딸의 집에 더 머물다 그해 8월 이곳으로 들어왔다. 가재 도구는 하나도 챙기지 못했고 자식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사고 후 2, 3번 정도 나미에초 집을 둘러봤지만 돌아갈 수 없었다. 그가 살던 나미에초는 방사성 물질이 곳곳에 퍼져 방사능 선량이 50밀리시버트(mSv) 이상인 ‘귀환곤란 구역’으로 지정됐기 때문이다.

옆 가설주택에 사는 노인 가와자키 카요코(72)도 건강이 많이 약해졌다는 걸 느낀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가설주택 생활이 2년 반이 넘어서면서 이젠 익숙해졌다”며 “스트레스를 담아두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가와자키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매일 1시간 이상 산책을 하고 쇼핑이나 취미생활도 한다. 사고 이전 나미에초에서 어머니와 아들 등 가족 7명이 함께 3ha에 이르는 농사를 지었던 그는 “잠시도 쉴 틈이 없었지만 행복했는데…”라고 말을 흐렸다. 2011년 사고 이후 가와자키는 어머니와 이곳으로 피난했고 아들 가족은 이와키시로 피난했다. 올해 설은 아들 가족이 피난해 있는 이와키시로 가 보냈지만, 생일날에는 공간이 너무 좁아 자식 가족을 부르지 못하고 생일 케이크를 사먹는 것으로 대신했다고 한다.

이곳 가설주택의 마츠모토 오시오(松本敎夫·76) 자치회장은 “가장 힘든 것은 역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이라며 “2만3000여명의 나미에초 주민들은 사고 이후 후쿠시마시나 이와키시는 물론 도쿄, 사이타마 등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고 안타까워했다.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로 ‘귀환곤란구역’으로 지정된 후타바군 나미에초에서 피난해온 주민들이 지난달 26일 오후 후쿠시마시 모리아이초의 한 가설주택 앞에서 아직 돌아갈 시기조차 확정되지 못한 상황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27일 오후, 미나미소마(南相馬)시 가시마초(鹿島町)의 한 가설주택. 2016년 10월부터 피난이 풀리는 오다카(小高)구에서 온 사람들이 있는 이곳에선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집합소’라고 쓰인 가설주택의 ‘살롱’에는 체조를 하는 이들도 있었고, 몇 사람은 차를 마시며 환담하기도 했다.

사고 직후 요코하마의 아들 집에 얹혀 지내다 그해 8월 이곳으로 온 우메다 치즈코(68)는 “특별히 생각한 것은 없지만, 방사능 제염작업이 끝나면 나와 남편은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고 이전 어머니와 남편, 아들 내외와 손자 3명 등 8명이 한집에서 즐겁게 생활하던 것을 더 이상 꿈꾸지 않는다. 어머니는 사고 후 고향을 보지 못하고 가설주택에서 세상을 떴고, 아들네 가족도 아이들이 어려 방사능과 학교 문제로 귀향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인구 1만3000여명의 오다카구 주민들은 사고 후 미나미소마 가설주택에 약 7000명이 피난해 있는 등 전국 각지에서 피난생활 중이다.

2011년 대지진과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가 앗아간 것은 집이나 돈만이 아니었다. 후쿠시마 주민들은 열도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 삶에 대한 희망이나 소중한 가족을 잃어가고 있었다. 햇살은 따뜻해졌지만, 후쿠시마에는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후쿠시마시·미나미소마시=김용출 특파원 kimgija@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아일릿 이로하 '매력적인 미소'
  • 아일릿 민주 '귀여운 토끼상'
  • 임수향 '시크한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