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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기다려라” 말만 반복하는 응급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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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2-02 21:41:52 수정 : 2014-02-02 21:4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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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세요. 호출했는데 안 오네요.”

대형병원 응급실에 실려가면 생명이 위태로워 숨을 헐떡이지 않는 한 “기다리라”는 말을 무한 반복해 듣게 된다. 2년 전 교통사고를 당한 아버지는 서울의 한 대형병원 응급실에서 12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얼굴 오른쪽 뼈가 세 군데나 깨져 안면이 일그러지고 몸 곳곳에 피떡이 붙어 있었다. 이마·볼뿐 아니라 안구를 둘러싼 안와 조직이 깨져 오른쪽 눈의 시력도 떨어진 상태였다.

얼굴을 다쳤기 때문에 외과·성형외과에서 협진해야 했는데 성형외과 의사가 오지 않는 게 문제였다. 오랜 시간을 기다리니 구역별 담당 간호사와 그들의 교대 시간이 파악됐다. ‘지금 왜 못 오는지, 언제쯤 오는지 정도는 알려줘야 하는 것 아냐?’ 복장이 터지고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간호사에게 “의사 선생님 언제 오시나요?”라고 물을 때마다 눈치를 살폈다. 의료진 기분을 상하게 해 불이익을 받을까 싶어서였다. 한 시간에 한 번꼴로 물었지만 답변은 같았다. “연락했는데 늦어지네요. 저도 이유를 모르겠어요.”

결국 아버지는 12시간의 기다림 끝에 성형외과 병동으로 옮겨졌다. 얼굴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눈만 내놓고 한 달 반가량 병원 신세를 졌지만, 퇴원할 때까지 의료진 중 누구도 응급실에서 겪었던 답답한 상황에 대해 해명하지 않았다.

이현미 문화부 기자
이러한 풍경은 해당 병원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구영 이화의료원 응급의학과 교수가 발표한 2008년 자료에 따르면 전국 20개 대형병원 응급실에서 사망한 외상환자 551명 중 32.6%(179명)는 ‘살릴 수 있었던 환자’였다. 진료과목 간 협진 체계 미흡과 환자 방치가 낳은 결과였다.

한국의 의료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을 향하고 있는데 응급의료 시스템은 왜 이 모양일까. 병원 관계자들은 “응급실은 수익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거의 모든 병원이 체면치레 정도로 응급실을 운영한다”고 입을 모은다. 의대 학생이 성형외과·피부과·안과에 쏠리면서 외과 전문의 수가 줄어든 것도 일조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많은 대형병원이 수백억원에서 수천억원이 드는 차세대 계획을 줄줄이 발표했다. 하나같이 “대학병원의 목표는 돈이 아니라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응급의료시스템에 대해 언급한 곳은 삼성서울병원과 길병원 2곳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입원했던 병원도 시설 개보수, 암병원 증축, 특성화센터 개설 등으로 세계적 역량을 키우겠다고 밝혔지만 응급실에 대해선 함구했다.

모든 대형병원들이 “낮은 의료수가 때문에 적자에 허덕인다”며 울상을 짓는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보전해주는 수가를 높이는 건 이들의 숙원이다. 이런 소망이 이뤄지려면 정부 관계자 앞에서 떼쓸 게 아니라 국민 건강권과 직결된 응급의료시스템 같은 기초 체계를 먼저 바로세워야 하지 않을까. 현재로서는 각 병원이 내놓은 차세대 계획을 접할 때마다 혀를 차는 국민이 많을 것이다.

이현미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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