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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 교수의 일본을 보면 한국이 보인다] 화재 이야기 2

관련이슈 심훈 교수의 일본을 보면 한국이 보인다

입력 : 2011-01-05 21:25:23 수정 : 2011-01-05 21:2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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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밀 거주 + 목조 건물 + 지진… 슬픈 ‘화재 방정식’ 변인 1: 과밀거주

‘런던 86만명, 파리 54만명, 베이징 50만명, 한양 30만명, 그리고 에도(東京) 120만명.’

1700년대 도쿄는 세계 최고의 메트로폴리탄이었다. 그렇잖아도 비정상적으로 긴 해안선에 수많은 이들이 몰려 살던 열도에서 인구의 수도 집중 현상은 17세기 이후 더욱 촉진된다.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통일 수도를 에도로 정한 이후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봉건 군주들의 처자를 볼모로 데려오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전국에 흩어져 있던 180여명의 봉건 영주들은 자신의 영지에서 1년, 에도에서 1년씩 번갈아 거주하며 자신의 가족들을 에도에서 상봉할 수밖에 없었다. 잦은 근무지 이동과 두 집 살림에 따른 지출 증가를 노려 봉건영주들의 재정을 악화시키고 가족들마저 볼모로 잡음으로써 반란의 싹을 없애려는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전략이었다.

이후 봉건 영주의 가족들이 부와 세를 과시하려 에도에 대저택을 지어대는 통해 공사에 필요한 인부와 기술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며 에도는 세계 최대의 정치 도시이자 소비도시로 탈바꿈하게 된다. 게다가 농촌 주민들마저 생계 유지를 위해 부와 향락이 넘치는 에도로 물밀듯 몰려오면서 인구 증가는 폭발적인 양상을 보이게 된다. 당시 전쟁 수행 등에 따른 가혹한 조세로 농촌에 아사자(餓死者)가 속출하면서 열도의 일본인들은 살기 위해 화재와 전염병이 창궐하는 에도로 기꺼이 발걸음을 옮겼다.

◇오사카 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에도시대의 시타마치(下町) 전경. 지진에 대비하기 위해 내진구조를 적용하다 보니 지붕에서부터 바닥은 물론 벽까지 온통 목재를 사용한 것이 일본의 가옥들이었다. 게다가 한정된 땅에 한데 모여 살다 보니 한 곳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금세 마을 전체로 불이 번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00만명 이상의 메트로폴리탄이었던 것이 에도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당시 지배계층이 사무라이였기에 도시계획이 철저하게 사무라이 위주로 이뤄졌던 까닭에서다. 예를 들어, 수도의 노른자위에 해당했던 에도성과 ‘조카마치’(城下町)로 불리는 에도성 주변에는 봉건영주와 사무라이 및 그 가족들만 거주할 수 있었다. 무려 6할에 해당하는 에도의 광활한 지역이 이들 몫이었다. 이와 함께 나머지 4할 가운데 절반은 다시 절과 신사가 차지해 갔다. 결국 나머지 2할 땅에 에도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60만명 이상이 몰려 살았다고 ‘일본재이사’(日本災異史)의 저자, 고시카 시마하테(小鹿島果)는 증언하고 있다.

21세기의 서울로 빗대 말하자면, 총 25개 구 가운데 5개 구에만 서울 인구의 절반인 600만명이 산 셈이라고나 할까? 한 개 구당 평균 인구 수가 120만여명에 달하는 초과밀 지역, 바로 아랫마을이란 의미의 ‘시타마치’(下町)가 콩나물 시루마냥 빽빽하게 들어서 있던 에도의 실상이었다. 



◇도쿄 어느 소학교의 담벼락에 붙어 있는 재난 대피 안내문. 지진에 따른 화재가 날 경우에는 해당 소학교에 모인 후 인근 스포츠센터 주변으로 대피하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변인 2 & 3: 목조 건물과 지진

이제, 초대형 재난을 위한 충분조건은 오롯이 마련됐다. 그렇다면 발화를 위한 불꽃만 튀면 되는 셈. 돌이켜보면 인류가 호롱불과 등잔불로부터 해방된 지는 2세기가 채 되지 않는다. 그나마도 2세기는 유럽과 미국에서 통용되는 숫자일 뿐, 한반도와 열도에선 전기가 본격적으로 보급된 지 1세기도 되지 않는다. 17세기 이후의 에도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집집마다 등잔불과 호롱불로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등잔불과 호롱불이 쓰러지고 넘어질 경우, 목조로 지은 일본 가옥들이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지진에 대비하기 위해 내진(耐震)에 강한 나무로 집을 지었건만 불에는 더없이 취약했던 구조.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그러한 발화가 지진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비극 중의 비극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밀어닥치는 지진으로 집 안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마을 어느 곳에선가 반드시 화재가 발생했고, 다닥다닥 붙어 살던 마을 전체는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여름철의 습기를 막기 위해 안방에는 다다미를 깔고 창문은 창호지로 구성하다 보니 그야말로 화재가 일어나면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그러고 보면, 지진이 없는 한반도에선 흙으로 조성한 집 벽과 담벼락이 방화벽 역할을 톡톡히 했는데, 열도에선 가옥 자체가 화약고였던 셈이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일본 전역에 붙어 있는 지진 대피 안내문에는 지진과 함께 반드시 화재 표시가 병기돼 일본인들의 경각심을 고취시키고 있다.



플러스 α (알파)

안타까운 사실은 기름에 튀기고 불에 굽는 일본의 음식문화 역시 화재 참사에 또 하나의 일격으로 작용했다는 점. 그러고 보면, 튀김 요리인 ‘덴뿌라’를 비롯해 ‘돈가쓰’와 ‘고로케’, ‘아부라 아게’(튀긴 두부)과 ‘쿠시아게’(꼬치구이)들은 부엌에서 발화가 시작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도쿄 다카다노바바(高田馬場) 지역의 주택가에 남아 있는 고택. 시에서 담벼락에 설치한 소화기가 인상적이다. 지금도 도쿄 곳곳에 남아 있는 오래된 나무 주택들은 화재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2002년 ‘건축과 화재’라는 책을 펴낸 일본화재학회에 따르면 부엌에서 조리하다 자리를 떠나는 등의 실수로 식용유에 불이 들어간 ‘튀김 기름 화재’는 현대의 여러 화인(火因) 가운데 부동의 1위였다. 예를 들어, 1989년부터 1994년까지 5년간 주택에서 발행한 7만여건의 화재 가운데 동·식물유에서 발생한 화재는 무려 2만335건으로 전체의 28.6%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정이 이럴진대, 불에 대한 피해의식이 없으면 오히려 이상한 곳이 일본이었다. 오죽했으면 악명 높은 ‘무라하치부’(村八分)에서조차 화재 진화는 제외시켰을까? ‘무라하치부’란 마을에서 규율과 질서를 어진 자에게 가하던 왕따의 일종. 지역공동체가 함께 처리하던 열 가지 행위 가운데 장례와 화재 진압을 제외한 성인식과 결혼식, 출산과 병 수발, 가옥 신축 및 재건축과 함께 수해 복구 지원과 여행에 관한 교류 등을 끊음으로써 대상자를 마을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관습이었다.

그렇다면 막부는 이 같은 화재 다발의 위험성을 낮추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을까? 사실 에도 정부는 조금이라도 민가의 화재 피해를 줄여보고자 막부 내내 기와지붕을 장려했다. 하지만 세계 최대의 메트로폴리탄인 에도의 전 가구에 기왓장을 공급한다는 것은 가내 수공업이 주를 이루던 당시의 경제구조상으론 불가능했다. 결국 에도 막부는 백성들에게만 자구책을 맡기기보다 직접 도시를 정비하고 소방시스템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불을 다스려 나가고자 한다.

다음엔 불가항력의 화재 발생을 최소화하고 피해 확산을 조기에 차단하기 위한 일본인들이 어떤 방재(防災) 지혜를 짜냈는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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