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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최민수 외조부이자 北유명배우,수용소에서 사망

입력 : 2011-01-25 08:58:48 수정 : 2011-01-25 08:5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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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안호균 기자 = 배우 최민수씨의 외조부이자 북한의 유명배우 겸 감독이었던 강홍식씨가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서 수감생활 중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대북 단파라디오 '열린북한방송'이 25일 보도했다.

이 방송에 따르면 2008년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라는 책을 펴낸 탈북자 김영순씨는 자신이 북한의 요덕 수용소에 있을 때 강홍식씨의 죽음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북한에서 평양예술대학 무용학부를 졸업하고 고위급으로 살다가 성혜림을 안다는 이유로 요덕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 9년 동안 복역하고 2001년 탈북, 2003년부터 한국에 살고 있다.

김씨에 따르면 자신이 요덕 수용소에 들어갔던 1970년 10월에 이미 강홍식과 그의 아들 강효선(남성, 당시 30대 후반)의 가족들이 수용소에 있었다고 한다.

김씨는 강홍식씨가 영화계에서 걸출한 인물인데다가 자유분방해 김일성 우상화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 북한 당국이 수용소에 구금시킨 것이 아닌가 추측했다고 한다.

김씨는 강효선씨의 아내였던 이해순씨와 무용학부 동기로 친분이 있었는데, 이씨는 김씨에게 영화출연을 위해 분장을 하고 있던 중 갑자기 끌려왔다고 말했다고 한다.

강홍식씨는 1949년 북한 최초의 예술영화 '내 고향'을 연출했고 북한에서 유명한 영화인 '최학신 일가'에서 '리처드 목사'역을 연기하기도 했다.

강홍식씨는 김씨에게 "영순아, 영화에 나 또 출연할 수가 있을까?"라고 묻는 등 수용소 안에서도 영화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강홍식씨의 얼굴이 흑인처럼 새까맣게 탄 얼굴로 소달구지를 끌고 다니는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고 김씨는 회상했다.

당시 강홍식은 '펠라그라'라는 병에 걸려 있었다고 방송은 전했다. 펠라그라는 니아신(비타민 B군에 속하는 수용성 비타민) 결핍에 의해 일어나는 병으로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는 지역에서 주로 나타난다.

이 병에 걸리게 되면 햇볕에 노출되는 부위에 통증을 수반한 홍반이 생기며 시간이 지나면 수포가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표피가 벗겨지면서 심한 색소 침착이 된다.

그래서 김씨가 기억하는 강홍식씨는 흑인처럼 까맣던 것이다. 김씨는 강홍식씨가 결국 이 병으로 요덕 수용소에 수감된지 1년 만인 1971년 가을 쯤에 수용소에서 사망했다고 전했다.

이후 1975년께 후계자로 결정된 김정일은 영화 선전사업을 강조해 북한 첫 예술 영화인 '내 고향'의 연출가를 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당사자인 강홍식씨는 이미 사망했고 남은 가족들은 살아있었기에 그 가족들은 1975년 수용소를 나갔다고 한다.

수용소에 들어오기 이전 배우로 활동했었던 아들 강효선씨는 수용소에서 나간 이후 함흥에 거주하다 북한의 유명한 시나리오 작가 이춘구의 부름을 받아 평양에 올라가 영화 '민족과 운명-노동계급편'에 공장 강선제강소 지배인으로 출연했다. 강효선씨는 김씨가 탈북하던 2001년 당시 평양통일거리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최민수씨의 어머니인 강효실씨(강홍식의 딸)와 외할머니인 전옥씨(강홍식의 처)도 모두 유명한 배우였다. 외할머니 전옥씨는 1920년대, 어머니 강효실씨는 1950년대 여배우로 활동했다.

이 방송에 따르면 2011년 현재 북한에는 6개의 정치범 수용소가 있으며 15만 4천여명의 수감자가 갇혀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ahk@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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