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잦은 야근에 밤샘 다반사… 저녁이 없는 ‘서글픈 미생들’

입력 : 2015-12-31 18:46:21 수정 : 2015-12-31 20:4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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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일제 10년… 여전히 긴 노동시간
야근공화국’이란 악명은 언제나 사라질까. 주5일 근무제가 100명 이상 사업장으로 확대된 지 올해로 10년째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여전히 긴 노동시간에 허덕이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14년 한국의 1인당 연간 노동시간은 2124시간이다. 32개 조사대상국 중 두 번째로 길다. 1371시간인 독일보다 800시간 가까이 많다. OECD는 기업 보고를 취합한 노동부 자료로 통계를 낸다.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를 기준으로 하면 노동시간은 2285시간으로 더 늘어난다. 야근에 지친 지 오래지만 획기적 변화는 요원해 보인다. 휴대전화 부품회사 엔지니어, 공공 문화예술기관 여성 기획자를 통해 야근 실상을 알아봤다.

◆휴대전화 부품회사 엔지니어·문화예술기관 기획자의 하루

#1. 새벽 4시, 어제 아침 8시 출근해 20시간째 근무 중이다. 사무실 의자에 기대 한 시간쯤 잤나. 뻑뻑한 눈을 비비며 다시 개발 샘플에 집중한다. 아침이 밝아온다. 사내 식당에서 10분 만에 후다닥 밥을 입에 밀어넣는다. 아직 일이 산더미다. 오늘 밤도 집에 가기는 글렀다. 정신을 차려보니 일한 지 37시간이 됐다. 주위 ‘밤샘 동지’들을 둘러본다. 샤워는커녕 속옷도 갈아입지 못해 다들 산적 같다. 작업은 동틀 무렵에야 끝났다. 집에 갈 힘조차 바닥 났다. 회사 동료 기숙사 방에 들어가 곯아떨어졌다.

휴대전화 부품회사 개발팀에서 일한 지 올해로 5년이다. 대기업에 납품하다보니 한 달에 한 번꼴로 초인적 야근이 돌아온다. 여유 있으면 3, 4일만 고생하지만, 심할 때는 보름 가까이 야근과 밤샘이다. ‘갑’인 대기업은 부품업체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납기일은 불변인데, 갑이 돌연 사양이나 부품을 바꾸면 발등에 불이 초고속으로 떨어진다. 야근이 없다고 ‘칼퇴근’도 아니다. 오전 8시 출근에 오후 9시 퇴근이 보통이다. 이번 밤샘은 유난히 독했지만 젊어서 견딜 만하다. 두 시간에 한 번 ‘믹스 커피’만 털어넣으면 된다. 극한까지 일해보는 것도 다 인생 경험이다. 다음 회사에서는 그만큼 일이 수월해지지 않겠는가. 원래 개발팀이 이렇다. 대기업 디스플레이 회사에 다니는 친구는 토요일 오전에 전화하니 그때 퇴근하고 있더라.

#2. 오후 7시, 지친 몸을 끌고 책상 앞에 앉는다. 이제부터 서류와 씨름이다. 오전 회의, 오후 외부 미팅과 현장답사로 돌아다닌 후라 피로가 몰려오지만 쉴 틈이 없다. 공공 문화예술기관에서 일하다보니 사업계획서, 결과보고서를 정확히 챙겨야 한다. 몸은 하나고 시간은 한정돼 있다. 결국 밥 먹듯 야근이다. 일주일에 한두 번쯤 9시 전에 사무실을 나서면 6시 정시 퇴근하는 느낌이다. 그 시간에 지하철을 타면 신기하다. 10시에 가면 ‘그냥저냥 일했구나’ 싶다. 한 달 초과근무가 50∼60시간쯤 된다. 야근이 반복되니 피로를 달고 산다. 가슴께가 따끔하거나 허리가 아프다. 지난해 해외 업무로 고생할 때는 거의 공황에 빠졌다. 시차 때문에 밤낮 가리지 않고 일이 진행됐다. 처음 맡는 해외 사업인 데다 혼자 하다보니 성과에 대한 부담도 컸다. 한 달쯤 이렇게 사니 심신이 피폐해졌다. 이럴 때 상담을 받으라던데, 그것도 시간이 돼야 가능한 거였다. 몸이 한계에 이르렀는지 정신이 멍해졌다.

결혼 4년차지만 둘다 바빠 집에서는 잠만 잔다. 지난 토요일, 한 달 만에 가스레인지의 불을 켜봤다. 이렇게 스트레스 받으며 일하니 아이를 가질 엄두가 안 난다. 내 몸도 몸이지만, 아이에게 영향이 가지 않을까 걱정이다. 야근하면서 아이를 키울 자신도 없다.

◆‘야근은 의무’ 구태 여전… 법·제도적 허점 ‘숭숭’

야근이 사라지지 않는 데는 밤 근무를 당연시하는 문화와 법·제도적 허점이 두루 작용하고 있다. 일부 사업장에서는 여전히 ‘야근=근면’ 공식이 통용된다. 반도체 부품업체에서 일하는 김모 대리는 “새로 온 부장이 얼마전 ‘자네는 너무 야근을 안 한다’고 말하고는 인사고과에서 가장 낮은 점수를 줬다”며 “입사 후 S, A만 받았고 올해 업무 실수는커녕 세 사람이 할 일을 혼자 했는데도 그러더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김 대리는 “지인의 회사에서는 ‘집에 가서 뭐 하냐, 일 없으면 회사 나와서 공부라도 하지’라고 공공연히 말한다”고 전했다. 

한 사람당 업무가 늘어나도 기업에서 신규 채용을 꺼리는 것도 문제다. 실제 김 대리의 반도체부품회사는 지난 6년간 매출은 비슷했음에도 개발팀 인원이 9명에서 3명으로 줄었다. 김 대리는 “일이 많다보니 한 동료는 아들이 태어날 때도 상사가 ‘나도 아기 낳아봤다, 굳이 아빠가 갈 필요 없다’며 붙잡아 부인 옆에 있어주지 못했다”고 말했다. 서울과학기술대 글로벌경영학과 노용진 교수는 “세계적으로 기업 생산성이 올라가면 사람을 줄이거나 개별 노동자의 업무 시간을 줄여왔는데, 기업은 통상 사람을 줄이는 걸 선호한다”며 “그럼에도 노동시간이 지속적으로 감소한 건 정부 정책과 노조의 활동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현행법의 허점을 꼬집는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유선 선임연구위원은 “현재 전체 노동자의 19%, 357만명이 주 52시간 이상을 일한다”며 “주 5일제에서 제외되는 특례업종·적용제외 업종이 많은 데다 노동부가 토·일요일 근무는 주 52시간에 포함하지 않아 문제”라고 지적했다. 노동부 해석에 따르면 주 5일제 아래서도 휴일 16시간을 더해 최대 주 68시간 근무가 가능하다. 게다가 현행법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지정노무법인 소민안 수석책임노무사는 “근로기준법을 위반해 연장근로를 시키면 2년 이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 벌금이 규정돼 있으나 사실상 처벌되는 사업장이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주 5일제가 남의 나라 얘기인 노동자도 여전히 많다. 소 노무사는 “식당 등 요식업종은 주 6일, 하루 12시간 근무가 보편적이라 저녁 없는 삶을 넘어 밤 없는 삶을 산다”며 “병원도 경쟁이 심화하면서 주 6일, 하루 10시간 근무가 일반화한 곳이 많다”고 밝혔다. 소 노무사는 “운수업종은 대표적으로 근로시간이 많은 업종인데 특히 마을버스 기사는 월 26일 2교대로 일하고, 택배업 종사자의 상황도 열악하다”고 전했다.

◆긴 노동시간, 생산성 저하로 이어져

일하는 시간은 길지만 OECD 기준 한국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하위권을 맴돈다. 비효율의 극치인 셈이다. 한국생산성본부가 OECD 34개 회원국을 비교한 결과 2013년 기준 우리나라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29.9달러로 25위로 조사됐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결실이 적은 이유는 영세 자영업자의 생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일부 제조업의 생산성은 오히려 상위권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오래 일하면 자연히 생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노동생산성은 실질 국내총생산(GDP)을 노동투입량으로 나눠 구한다. 여기서 노동투입량은 총 노동시간에 취업자 수를 곱하기에 근로시간이 길면 자연히 분모가 커져 생산성이 떨어진다. 한국노동연구원 김승택 본부장은 “우리나라의 1인당 노동생산성은 선진국보다 낮다고 볼 수 없으나 시간당 생산성이 떨어진다”며 “선진국보다 시설·장비·업무환경 투자가 부족한 데다 오래 일하는 게 습관이 돼 업무 집중력이 낮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선진국형 경제로 가려면 장시간 근로는 오히려 저해요인이고 기술 발전을 통해 한 단계 올라서야 한다”며 “더 나은 관리시스템과 자원 투자로 일하는 시간을 줄여야지 언제까지 인건비로 돈을 벌 것인가”라고 지적했다. 

수당이 제대로 책정되지 않는 것도 한 요인이다. 소 노무사는 “현장에서 활동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건, 연장·야간·휴일 근로를 해도 수당을 제대로 주지 않는 점”이라며 “수당이 적으니 당연히 업무 몰입도와 생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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