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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한국 고아 3000명 키워낸 다우치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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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8-11 19:17:53 수정 : 2010-08-11 19: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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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오랫동안 강연이나 수업을 통해 소개하면서도 직접 가보지 못했던 목포로 향했다. 일본인 다우치 치즈코(한국 이름 윤학자·1912-1968)의 발자취를 찾기 위함이었다. 유달산 기슭에 자리 잡은 ‘공생원’에 도착했을 때는 붉은 노을이 목포항에 반사되어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했다.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곳’을 뜻하는 공생원은 한일근대사의 가장 아팠던 세월 속에서 참된 어버이 마음으로 국경과 민족을 초월하여 인도주의적 사랑을 실천한 상징적인 곳이었다. 그곳을 지켜온 사람은 한일사회의 우호를 간절히 원했던 ‘어머니’ 다우치 여사였다.

◇이수경 일본 국립 도쿄가쿠게이대 교수
일제 강점기 때 부유한 집안의 무남독녀 외딸로 태어난 다우치는 조선총독부에 근무하는 아버지를 따라 1919년에 고향인 시코쿠의 고치에서 한국으로 왔다. 당시 목포에서 고아들을 키우기 위해 걸식을 하며 아이들을 돌보던 일명 ‘거지대장’이라 불린 윤치호를 도와주다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하게 된다.

1910년 일제는 한국의 토지 확보를 위해 ‘토지 조사 사업’이란 명목으로 조선인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았다. 땅을 잃은 소작인 등은 살기 위해 새로운 터전을 찾아서 만주땅으로 이주했고 가족들의 목숨 건 만주로의 여행에서 병들거나 어린 아이들이 버려지자 윤치호는 그들을 거둬들여 보살폈다. 윤치호 자신도 끼니를 걸렀던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그런 윤치호의 헌신적 정신을 존중하고, 그의 청혼에 서슴지 않고 그의 반려가 될 것을 결단한 다우치는 자신을 돌볼 사이도 없이 아이들에게 모든 사랑을 쏟아붓는다.

진솔한 사랑과 신뢰로 다져진 부부에게 1950년의 한국전쟁 발발은 큰 고통으로 다가왔고, 전쟁으로 인해 버려진 고아들이 급증하면서 당장 먹을 음식이 없어서 곳곳에 구걸을 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시련이 계속되었다. 그런 와중에 음식을 구하기 위해 외출한 윤치호가 행방불명이 되었고, 다우치는 서툰 한국말로 필사적으로 300여명의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돈이 되는 모든 것을 다 팔아야만 했다. 내 민족 내 부모조차 버린 어린 아이들을 결혼 후 30여년간 3000여 명이나 키워냈다. 한국 정부로부터 1963년 한국 문화훈장을 받았지만 이미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고생의 후유증과 폐암으로 56세의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

각박한 삶의 쳇바퀴 속에서 개인주의로 치닫는 우리 사회가 다우치의 애정 어린 보살핌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볼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편으로 일본은 ‘사죄외교’라고 외치는 일본 보수파의 이기적인 과거사 해석이나, 오와비(사과)라는 가벼운 용어와 더불어 ‘조선왕실의궤’의 양도라는 형식만으로 일제 강점기의 눈물 어린 고통의 역사를 덮어버릴 게 아니다.

진정한 미래 한일 관계를 위해 더 이상 역사의 오점을 남기지 않도록 깔끔한 청산을 위한 과거사 공동 연구 및 공유, 기억의 교육을 통하여 미래 지향적인 화해와 평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절실하다. 다우치 여사의 일생처럼 한국과 일본이 함께 살아가는 공생의 미래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수경 일본 국립 도쿄가쿠게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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