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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철 칼럼] 화장실에서 낙서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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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2-02 21:21:27 수정 : 2009-02-02 21: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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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방송에 둥지 튼 낙서

낙서 추방은 지도층 언어순화부터

지난여름 역과 고속도로 휴게소 등지의 화장실 낙서가 사라졌다는 소문을 들었다. 기연가미연가해서 틈날 때마다 공중화장실의 낙서를 찾아 나서는 기행(奇行)이 생겼다. 탐사 대상을 유원지, 행락지 등 다중이 모이는 곳의 공중변소로까지 넓혔다. 반년간의 현장답사(?) 끝에 정말 낙서가 감쪽같이 없어진 사실을 발견했다.

좌변기보다 쪼그려 앉는 변기에 익숙했던 시절의 서울역이나 고속버스 대합실 내 화장실 벽면에는 온갖 낙서가 춤을 추었다. 음담패설과 지저분한 성적 욕설, 그림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어설픈 삼류 춘화 등이 대종을 이뤘다. 혹간 ‘나는 배설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사이비 철학적 문구가 화장실의 냄새를 잊게 해주었다. 때로는 ‘직선 개헌 쟁취하자’ ‘타도하자 군사정권’ 등의 반정부 구호도 눈에 띄었다. 글쓴이의 얼굴이 궁금하였다.

사라진 것은 화장실의 낙서뿐만 아니었다. 학교 담장이나 주택가 골목길의 담벼락에 있던 낙서들도 눈에 띄지 않았다. ‘5학년 5반 김××과 이××는 사귄대요. 얼레리꼴레리(알나리깔나리)’ ‘박××. 넌 내꺼야’라는 벽서는 유년기의 우리들의 얼굴을 얼마나 붉게 물들게 했던가.

도대체 그 많던 우리 이웃의 낙서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실종의 이유는 무엇인가. 녀석들에 대한 수색작업은 싱겁게 종료되었다. 그들은 냄새나는 화장실을 떠나 안방이나 사무실, 휴게실의 컴퓨터 안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인터넷의 도움을 얻어 홈페이지, 블로그, 댓글 등 형형색색의 옷으로 갈아입고서 저마다의 위력을 뽐내고 있었다. 주거환경의 변화와 함께 그들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과거의 개인적 차원의 욕설과 분노가 아니라 사회 전체에 대한 저주와 악담이 넘쳐났다.

아날로그 시대의 화장실 낙서가 화살의 빠르기와 돌멩이의 파괴력를 지녔다면 디지털 시대의 인터넷 욕설은 빛의 전파속도와 원폭 이상의 살상력을 갖췄다. 인터넷 낙서는 낙서로 머물기를 거부한다. 살상무기로 변질되었다. 최진실씨 등 적잖은 인사가 숨졌다.

낙서의 탐욕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들은 케이블을 넘어 지상파 방송으로까지 그 활동무대를 확대했다. 연예프로그램은 막장까지 갔다. 시사, 교양, 사회고발 프로그램에서도 확인되지 않는 주장, 일방적인 주장이 정제되지 않고 횡행한다. 지난해 봄 부정확한 사실을 자신의 입맛대로 가공해 대중에 뿌린 한 방송사의 시사 프로그램은 우리 사회 전체를 태울 뻔한 대형 화재를 불러일으켰다.

사회 혼란의 주요 수단이 되었고 체제 전복의 전위대를 꿈꾸는 지경에 이르렀다. 낙서의 피해에 견디다 못해 분노의 여론이 들끓었다. 인터넷 규제의 목소리가 높다. 사이버 모욕죄, 인터넷 실명제의 법제화가 속도를 내고 있다.

낙서는 변과 같은 존재다. 변의 상태를 보면 인간의 건강상태를 알 수 있다고 의사들은 말한다. 같은 논리로 낙서는 우리 문화의 수준을 가늠케 하는 저울이다. 낙서의 타락은 우리 사회가 크게 병들어 있음을 증언한다.

낙서로 전락한 인터넷, 방송 등에 규제가 필요하다는 데는 크게 이의가 없다. 그렇지만 얼마간의 부작용이 있다고 인터넷에, 방송에 재갈부터 물리는 것이 바람직한지는 자신이 없다.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는 기본권 중의 기본권이며 오늘날 민주주의를 있게 한 버팀목이요 주춧돌로 작용한 것을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법 이외의 대안을 강구해야 한다. 여러 방안이 있겠지만 우선 우리 사회가 최소한의 품위와 예의범절을 갖추는 것이다. 말 한마디에 욕설 한마디가 이어지는 요즘 같은 세상에는 더욱 그렇다. 지도층부터 앞장서면 효과적임은 당연하다.

커피는 사발에 마셔도 맛은 그대로다. 그렇지만 받침을 갖춘 예쁜 잔에 마시면 좋지 않을까. 낙서의 수준 향상을 위해서. 형식이 내용을 규제한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울림이 온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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