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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칸 드림, 그 애환의 현장을 가다]<23>남아共(3)완구류 수입 케니민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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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2-08-16 16:27:00 수정 : 2002-08-16 16: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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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구매-직판...''현지화'' 성공 남아공은 인구 약 4200만. 그중 흑인이 약 3300여만명, 네덜란드와 영국계 백인이 약 450만명, 인도계 혼혈인이 거의 400만명에 이른다. 아프리카 곳곳에서 그렇듯이 남아공에도 중국인이 엄청나게 몰려들고 있다. 최근 10년새 중국인은 30만명으로 불었다. 한국인이 2000명으로 불어난 것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폭발적이다.
이들은 헐한 노동력과, 액세서리에서부터 의류 완구 잡화 타이어 등 값싼 중국상품으로 아프리카 시장 곳곳을 공략하고 있다. 10여년 전 섬유류 잡화 등을 수시로 몇 컨테이너씩 수입해 팔며 재미를 봤던 한국인들은 요즘은 거센 중국인 물결과 중국상품에 밀려 설 땅이 좁아졌다. 이 때문에 한인 가운데는 제조업에 나서거나 현지에 뿌리내릴 수 있는 새로운 개인사업을 모색하는 이가 늘고 있다.

케니 민(한국명 민경준.55)씨는 중국 완구류 수입과 도-소매로 기반을 넓힌 사업가다.
요하네스버그 시내 폰틴블로에 있는 그의 ''하영 장난감-선물의 집'' 매장은 약 800㎡(약 260여평). 진열대 위로는 인형이나 로봇, 모형 자동차에서부터 무선조종 헬기 등 첨단장난감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제품이 빼곡이 쌓여 있다. 큰 창고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물량이 보관돼 있다.
최근 몇년새 그의 사업은 성장을 거듭해 왔다. 민씨가 중국과 한국 등지에서 수입하는 장난감 물량은 연간 40피트 컨테이너 40∼50개에 이른다. 시내 5㎞쯤 떨어진 곳과 인근 프리토리아시에도 직영 점포가 있고, 같은 이름의 프랜차이즈 점포가 프리토리아와 케이프타운 등 여러 곳에 생기고 있다. 올해 말까지 남아공에서만 7∼8곳쯤 생길 예정이다. 멀리 동부아프리카 말라위 등지에서도 프랜차이즈 신청이 들어오고 있다. 이들 프랜차이즈 점포에는 그가 물건을 대주므로 점포수가 늘면 늘수록 그의 수입-도매 물량도 커진다.
그가 아프리카에 온 것은 1990년. 돌아보면 처음 8년은 갖가지 탐색의 과정이었다. 자동차 수입, 돌 가공, 선물가게 운영, 도토리 수출 등등. 지금 기반을 다진 완구류 사업은 일찌기 한국에서 경험을 쌓은 분야다. 결국 오랜 탐색과 모색 끝에 가장 잘 아는 ''전공분야''로 복귀한 셈이다.
한국에서 80년대 후반 봉제완구 공장을 운영했던 그는 90년 공장을 정리했다. 값싼 중국산 완구가 밀려들면서 조만간 봉제완구가 사양길에 접어들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었다. 그때만 해도 아직 심각한 지경은 아니었기에 주위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를 말렸다. 그러나 그는 재봉틀 등을 다른 사람들에게 거저 넘겨주고 새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모험을 시도한 것이다. 유럽 여기저기를 둘러본 뒤 그는 남아프리카 스와질랜드에 첫발을 디뎠다. 여기서 그는 자동차 사업에 관심있는 친구를 위해 인근 모잠비크에 한국산 버스 140여대 수입건을 주선했다.
한국과 남아공이 수교를 맺자 93년 그는 가족과 함께 요하네스버그로 왔다.
"처음 잼스톤 자수정 같이 값나가는 돌을 수집, 반가공해 일본에 파는 일을 해봤어요. 그런데 유통되는 돌 중엔 광산에서 일하는 흑인들의 장물도 적잖아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더라고요."
호구지책은 될지언정 사업거리론 마땅치 않다고 여겨지자 이를 그만두었다. 이어 민씨는 김명환씨와 함께 도토리를 한국으로 수출하기도 했다. 묵을 만드는 데 쓰이는 도토리는 남아공에선 지천인데도 그냥 버려지고 있었다. 이들은 흑인들을 고용해 도토리를 대량 수집한 다음 이를 건조시켜 수출했다. 5년쯤 해온 이 사업은 민씨가 완구류 사업에 나설 즈음 동업하던 김씨가 모두 인수했다. 현재 케이프타운에 사는 김씨는 도토리 농장을 조성해가며 이 사업을 독자적으로 계속 키워가고 있다.
민씨가 완구류 도소매에 나선 것은 99년부터. 한 완구점 대리인의 권유를 받고 시작했다. 처음엔 한 컨테이너를 수입했다. 때마침 요하네스버그에서 무역전시회가 열렸는데, 샘플만 전시한 그의 조그만 부스가 뜻밖에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첫해에는 수입 완구의 절반쯤이 한국산이었습니다. 지금은 중국산이 대부분이고 한국산은 10%도 안됩니다. 중국산은 고장이 잦아 고급제품을 찾는 이에겐 한국 물건을 권하죠. 하지만돈이많지않은아프리카인들은질을별로따지지않아요.우선값싼것부터찾습니다."
완구점을 차린 뒤 그는 기존 점포들과의 가격경쟁을 치러야 했다. 지지 않으려면 싸게 팔 수 있어야 한다. 원하는 제품을 보다 싸게 사려고 그는 공동구매를 시도했다. 현지의 여러 완구 수입업자를 찾아다니며 물건을 함께 사서 수입가를 낮추자고 제안했다. 이 전략은 그대로 적중했다. 그의 구매량이 많아 다른 업자들도 공동구매에 참여하면 적잖은 이득을 볼 수 있었다. 물건을 수출하는 쪽에서는 그가 워낙 큰 고객인 만큼 다른 업체보다 더 싼 값에 공급해 주었다.
그는 수입상을 통하지 않고 중국 상하이 광저우 등지의 생산공장에서 직접 물건을 사들인다. 거래물량도 많지만 신용을 잘 지키기 때문에 가격은 중국인 수입상보다 더 좋은 조건이다.
이 때문에 그가 취급하는 물건은 요하네스버그에서 가장 값이 싼 것으로 소문나 있다. 똑같은 제품인데 다른 점포에 비해 반값이 안되는 예도 있다. 이제 어느 누구도 그와는 가격경쟁으로 맞설 수 없게 된 것이다.
민씨는 남아공에 온 것을 무척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다. 경제적인 안정을 얻은데다 이곳 교육여건이 좋아 자녀의 성장에도 보탬이 됐다. 그 자신 기독교 신앙을 갖게 돼 정신적으로도 거듭나는 기회가 됐다.
"한국 사람이 아프리카에 오면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자동차 정비업에서부터 금형, TV수리, 전기전파사, 용접까지 유망한 게 많습니다. 땅을 빌려쓰기 수월해 농사도 크게 지을 수 있습니다. 농업분야엔 중국인이 많지만 한국인에게도 전망이 좋다고 봐요."
그는 인근 모잠비크 쪽에서는 만성적인 기근을 퇴치하려고 넓은 땅을 거저 빌려주며 농업이민을 적극 유치하려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한국인으로서는 남아공 등지에서 경제성 있는 특수야채나 화훼 재배, 수경재배도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는 것이다.
"무얼 하든 현지인과 몸으로 부딪치면서 기반을 닦는 게 좋습니다. ''체면'' 생각하면 안됩니다. 물정을 알아보지도 않고 한국인끼리만 어울려선 그르치기 쉽습니다."
그는 중국인을 거울 삼을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들은 시장에서 좌판을 벌여 장사를 많이 하고 길거리에서 행상도 많이 한다. 물론 경제력이 약한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몸으로 부딪치며 경험을 쌓기 때문에 금방 기반을 잡고 일어선다는 것이다.
/차준영기자 jycha@sgt.co.kr

<사진>아프리카의 땅끝 희망봉의 케이프 포인트 정상에 오른 관광객들이 대서양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곳에서 멀리 왼쪽으로는 인도양이 펼쳐진다. 아래는 케니 민 사장.
/케이프타운=최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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